문화사회

황교익 논란에 부쳐 - 평론은 리바이벌하지 않는다

까칠부 2018. 12. 21. 18:34

원래 시험도 그렇다. 채점을 두 번 하는 경우는 없다. 학생이 직접 시험지를 들고 와서 항의하지 않는 이상 채점은 한 번으로 끝난다. 원래 출제 의도가 그렇고 따라서 정답은 이것이다.


평론도 비슷하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자기만의 평가하는 원칙이 있다. 따라서 그에 따라 평가한다. 그 평가를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반박하면 그에 대해 반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만의 기준이나 원칙을 확인하는 결과이지 그것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과정은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비평가의 수 만큼 서로 다른 기준과 견해가 존재하고, 원칙과 방식이 존재한다. 그래서 누가 더 우월하고 누가 더 열등한가.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경우는 한 가지다. 선생들이 그런다. 그것도 채점할 때가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렇게 한다. 지식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려 할 때 계속해서 한 가지 주장을 반복한다. 자기가 지금 말하고 있는 한 가지가 오로지 정답이다. 황교익이 실수한 부분이다. 한 번 말해서 들어먹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냈어야지 너무 길게 끌고 갔다. 백종원의 비판은 적확하다. 더이상 황교익은 평론가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이 평론가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은 자기와는 다른 보다 수준높은 견해를 듣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참고의 대상이지 학습의 대상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평론가란 교육자가 아니라 서비스업 종사자다. 대중이 필요로 하는 고급지식과 정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전달한다. 대중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설득하려 해서도 안되고 싸우려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럴 것이면 그냥 나처럼 블로그나 하라. 심지어 나도 내 블로그에서 굳이 싸움같은 건 하지 않는다.


어쩌면 평론가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래서 자기가 한 말이나 쓴 글을 쉽게 잊는 것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런 평론을 한 자기만의 기준이나 원칙이지 그때 자기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가 아니다. 그런 것 일일이 기억하고 신경쓰다가는 대상이 특정되어 버린다. 객관적이 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버린다. 감정적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역시 나 또한 어지간하면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더욱 반복해서 글쓰거나 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더이상 평론이라 할 수 없다. 그냥 싸움이고 배설일 뿐이다. 그것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아 혼자서 쉐도우복싱하는 모습은 추잡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백종원식 요리에 대해 그다지 호감이 없다. 그래서 가만 방관자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그런데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한 번 이야기했으면 끝이다. 백종원에게든 아니면 대중에게든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황교익에게는 다른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책임도 권한도 없다. 가르쳐서 바꿔야 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 그냥 자기가 생각한 대로 평론을 쓰고 받아들이든 말든 그에 따른 대가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받는 자신의 부와 명성이 자신의 평론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평론가를 도대체 뭐라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평론가도 사람이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고 대놓고 싫은 사람이 있다. 말하지 않고는 못배기겠는 상황이란 것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냥 일개 블로거가 아니다. 유튜버도 아니다. 자기가 가진 영향력 만큼 돌려받는다. 철없는 어린아이 같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너무 모른 것이다.


물론 그다지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관계로 나 역시 이것으로 끝이다. 어른이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보다보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하고 싶었다. 사람이 참 찌질하다. 나이만 많다고 어른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