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 시시하고 시시한 인간들을 위해

까칠부 2019. 1. 17. 06:26

아마 윤태주 자신이 엘리트이기 때문일 것이다.모르긴 몰라도 크게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일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비굴하고 비겁하고 비루한 한심한 자신이.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었다. 나란 존재가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그러나 인간은 원래 시시한 것이다. 시시해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고 거짓말쟁이에 교활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속이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진실의 거울에 비춰 본다면 인간인 자신은 얼마나 추악한다. 그 사실은 인정할 수 없기에 때로 난폭해지고 때로 잔인해진다. 내가 완벽하지 못해서 상처받고 남이 완전하지 못해서 분노한다. 대개 가정폭력의 원인도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런 타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졸렬함 때문이다.

 

새엄마 역시 자기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함을, 아직 아이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 역시 얼마든지 시끄럽고 더럽고 말까지 안듣는 사고뭉치일 수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그리 여겼더라면 어땠을까? 비로소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순간의 추악한 자신을 받아들였을 때 허진옥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모든 원망과 미움과 분노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차우경이 붉은 울음의 제안을 거부하고 허진옥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 이유다. 용서도 화해도 단지 그 끝에 보게 될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윤태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답을 알아도 스스로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동생 이은호가 겪은 고통이, 은호가 놓였던 불행한 환경들이, 무엇보다 은호가 죽고 자기만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이 스스로 그 답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시완과 차우경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진정 그들을 통해 구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차우경의 선택에 너무나 순순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랬구나. 사는 것이 답이었구나. 삶이야 말로 답이었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삶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그것이야 말로 진짜였구나. 하지만 후회는 없다. 마음껏 발버둥치고 방황하며 마침내 답을 찾았으니.

 

어쩌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인지 모르겠다. 부모도 아이도 완전하지 않다. 어떤 부모도 아이도 완벽할 수 없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이가 두려웠다. 아이가 부담스러웠다. 그저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조금 모자라도, 조금 못미쳐도, 그래서 매번 아쉽고 미안하고 죄스럽더라도, 그래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지금 여기서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자기 동생을 죽인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인 새엄마와 그 친딸조차. 인간은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저 지레 못미치고 모자르다고 포기하고 절망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다.

 

뜬금없을 수 있는 마지막 답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그래서 원래 인간은 시시한 존재이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나가려 한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자유롭기 위해서.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기 위해서. 그럴 수만 있으면 이 모든 비극들도 처음부터 없었지 않을까. 그 자리에 멈춰 주저앉는 것이 아닌 두렵고 불안해도 일단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형사 강이헌이 아이란 사랑스런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처럼.

 

조금 극적인 요소가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완성도는 높지만 한 편으로 어둡고 우울한에다 밋밋하기까지 하다. 선악이 명확하지 않다. 마지막 범인인 윤태주조차 악역이라기에는 그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결론마저 내가 항상 주장하던 그대로였다. 삶이 곧 답이고 구원이고 진실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 깨달은 단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