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 어떤 비겁한 우울함에 대해서...

까칠부 2019. 1. 27. 06:56

'나의 아저씨' 처음에 이지안이 회사에서 믹스커피를 한 뭉텅이 들고 가서 집에서 타먹는 장면에서 더 이상 보기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딱 IMF때 내가 그랬었거든. 라면 살 돈도 없어서 단골만화방에서 공짜로 주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버텼었다. 이후 야간일을 하면서도 밤에 따로 먹을 시간도 돈도 없을 때 믹스커피를 잔뜩 타먹으며 버틴 적이 있었다. 커피는 - 특히 믹스커피는 그런 점에서 참 좋은 음식이다. 정신도 맑아지면서 커피와 프림으로 인해 어느 정도 열량도 보충해준다. 다이어트에는 적이겠지만.


원래 우울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들어갈 듯한 우울한 이야기들에 이끌리는 편이다. 단, 내 이야기는 아니다. 남의 이야기일 때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때 내 이야기처럼 그 우울함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닮았다면? 내 처지와 비슷하다면? 추억삼아 그런 것들을 즐기는 이들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나는 아니다. 그런 건 추억이 될 수 없다. 고통이 어떻게 추억이 되는가? 하지만 남의 이야기라면 그 우울함도 하나의 유희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도 있구나.


그런 점에서 나는 온전히 비극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과연 영화나 드라마, 만화, 소설 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가 싶다. 아마 없지 않을까? 한 걸음 떨어져서 철저히 안전한 곳에서 타자로서 객관화하여 하나의 유희로써 그런 우울한 이야기들을 즐긴다. 바로 이 드라마처럼. 경단녀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테니까. 벌써 몇 년이나 결혼하고 아이 기르며 사회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다시 떠밀리듯 돌아가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란 내게는 절대 해당없는 이야기일 테니까.


같은 경력단절이라도 남성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평생을 사무직만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려 하면 막막하기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성과 다르다는 것은 그런 남성을 대하는 세상의 눈이 절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20대 남성들에게 지금 당장만 보면 여성들이 자신들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30대, 40대가 넘어서도 그럴 것인가? 20대 젊은 직장인들도 한 목소리로 말한다. 결혼했으면 여자는 직장에 나오지 마라. 임신하고 계속 직장에 다니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굳이 직장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성을 상실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은 나이를 먹었어도 오히려 중장년으로 갈수록 남성성이 강화된다. 최소한 세상의 일반적인 시각에 아줌마는 여성이 아닐 터다.


그런 점에서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아줌마 치고 너무 예쁘다. 여전히 주위에 매력적으로 비쳐질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줌마다. 나름대로 많은 경험과 경력을 가졌음에도 결국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아줌마일 뿐이다. 이혼을 하고 났더니 결국 자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그런데 그런 심정을 전혀 남인, 더구나 남성인 내가 온전히 알고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현실들이 있음을 보아서 들어서 알기에 짐짓 공감하는 양 설핏 이입하여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여성향 판타지라고. 공감한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환상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고단한 현실을 이겨낼까? 어쩌면 내가 매주 사는 로또와 같은 것일 게다.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꿈이라도 가져야 사람은 살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남성과는 상관없을 수 있다. 자신을 굳이 이입하기에는 이종석은 너무 잘났다. 그런 너무 잘난 남자이기에 판타지가 되는 것이기도 할 게다. 얼마나 주인공 강단의 불행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가가 드라마의 재미를 결정하지 않을까.


아마 드라마의 첫회라서일까 작가는 끊임없이 주인공 강단을 나락으로 떠밀고 있다. 결혼부터 시작이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집까지 넘어간 상황에서 이혼까지 당한다. 딸은 유학중인데 통장의 잔고조차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경단녀라고 아무곳에서도 써주지 않는다. 그나마 집마저 허물어지고 구두마저 잃은 채 비에 쫄딱 젖어 갈 곳 없이 소주병을 들이키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 누군가 그녀의 발에 신겨주는 것은 신데렐라의 구두였을까? 고단한 현실은 끝나고 꿈이 시작될 것이란 소녀의 성냥이었을까?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한 편으로 너무 뻔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꿈같은 사랑을 시작하겠지.


판단은 뒤로 미룬다. 모든 드라마는 처음에 좋은 의도로 기획되고 제작된다. 시청자에게 재미있을 것이라 여기기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드라마를 만들고 방영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결과까지 모두 좋은가. 전작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런 점에서 아주 큰 교훈을 남기고 종료되었다. 시작이 좋아도 끝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작 자체는 흥미롭다. 신데렐라이기를 거부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아줌마의 꿈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그녀의 꿈은 이루어질까? 흥미를 끌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