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캐슬 - 끝, 그러나 시작, 그리고 엄마들...
최근 인터넷을 보면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시험의 공정함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수능은 물론 사법시험, 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은 공평해야 하며 결과는 공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정의로운 차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마디로 여성이고 지방출신이고 고졸이고 상관없이 모두를 한 줄로 세워서 실력있고 자격있는 사람만 남게 하는 것이 곧 정의인 것이다. 과연 그런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벌써 나이가 꽤 되었다. 과연 대학입학이 끝이었는가? 아니면 첫직장이 내 인생의 끝이었는가? 과연 결과의 정의를 이야기할 때 내게 결과란 언제였고 무엇이었는가? 하지만 고등학생 때야 대학입학이 전부일 테니까. 취업준비생 입장에서야 취업이 인생의 끝일 수 있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무슨 직장을 가지는가가 나머지 인생을 결정할 테니까. 그래서 진짜 그런가?
드라마를 보면서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어떤 생각에 천착해 있을 때면 꼭 그와 연관된 주제의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아니면 덕분에 엉뚱한 드라마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엄마들은 저리 필사적인 것일까? 어째서 차교수는 다른 아빠들과 달리 자식들 교육에 저리 필사적인 것일까? 아내며 자식들이며 모두 떠난 뒤에도 혼자 남아서 피라미드를 닦고 있었다. 결국은 그들 역시 대학입학이 곧 인생 그 자체라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하긴 맞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는가가 대부분 남은 인생을 결정하기는 한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서 무슨 직업을 가지는가에 따라 대부분 남은 인생이 결정된다. 누군가는 의사가 되고, 누군가는 판사가 되고, 누군가는 공사장 잡부를 전전한다. 직업에 따른 사회적 지위도, 대우도, 경제적인 격차까지 크게 나니 결국은 대학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자식들을 더 좋은 대학에,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보내려 노력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노승혜든 진진희든 굳이 직업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경우들이었다. 이수임 역시 곽미향이 겪어야 했던 굴욕적일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곽미향도 차민혁도 이해하지 못한다.
곽미향과 차민혁이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였다. 어떤 환경에서도 공부만큼은 열심히 했다. 어떤 조건에서도 공부만큼은 남들과 달리 열심히 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곽미향에게는 시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서울대 의대라는 타이틀이 필요했고, 차민혁에게도 자신이 좌절한 꿈을 누군가 대신 이루어주어야 했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자식들을 위한 최선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서울대 의대만 갈 수 있으면. 서울대 법대만 갈 수 있으면. 그래서 3대째 의사가 되고, 2대째 판검사가 될 수 있으면. 그러면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분명 그런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블랙코미디일 텐데도 오히려 드라마를 보는 다수 시청자들이 곽미향이 딸 예서를 서울대 의대에 합격시키기 위해 선택한 김주영이라는 입시코디네이터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그만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기껏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만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시험에서 능력껏 좋은 대학 출신들이 더 많이 합격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것이 평등이며 공정함이다. 그리고 실제 그동안 그래 왔었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식은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그것이 그동의 모든 과정을 정당화시켜 줄 것이다.
엄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 악해지는 것은 대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다. 인간은 누구나 선하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악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 누구보다 악해지기도 독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것인가. 노동자를 위한 소비에트에서는 노동자가 없었고, 여성을 위한다는 페미니즘에도 여성은 없다. 자신의 선의가 때로 대상마저 대상화시켜 버린다. 자식이란 주체가 아닌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객체다. 곽미향의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곽미향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는 말이 그들을 막다른 상황으로까지 내몬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엄마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자식들이란 것은 얼마나 위대한 아이러니인가.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딸을 위해서. 그 딸에 걸었던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위해서. 하지만 곽미향은 엄마였었다. 그럼에도 딸의 불행을 끝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는 마냥 딸을 사랑하는 엄마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 김주영이 마지막에 건넨 의문은 그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죄다. 김주영이든, 김주영으로 인해 파멸한 이전의 많은 가족들까지.
역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아니라 이걸 봤어야 했다. 워낙 게임을 좋아해서. 더구나 시작이 너무 흥미로웠다. 한 번에 드라마 두 개를 본다는 것이 보통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그만한 시간도 부족하다. 덕분에 일주일 다른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다행히 굳이 신경쓰며 볼만한 드라마가 없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일이 마지막.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다. 인기가 있을 만하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