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해치 - 역사농락, 그러나 재미있다

까칠부 2019. 2. 13. 07:18

다른 사람도 아닌 영조가 노론과 대립하는 설정부터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태어난 지 100일만에 원자로 책봉된 세자가 있었을 텐데 벌써 4대 전인 효종에서 갈라진 소현세자의 후손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왕위계승에 있어 정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왕조국가에서 적통을 제치고 방계가 왕위를 노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아무리 노론의 세력이 강해도 정통성마저 무시한 채 왕에게 후계를 강요한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한 것과 다름없다. 실제 역사에서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은 그대로 쓸려나가고 만다. 참고로 밀풍군의 장남이 후사가 없던 경종의 양자로 거론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기반없이 졸지에 숙종의 승은을 입어 왕자까지 생산한 탓에 장희빈의 질시와 견제를 받았던 숙빈 최씨는 어쩔 수 없이 반대정파인 서인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 역시 서인의 분파인 노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노론 역시 생모인 장희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에 경종보다는 그 대항마로서 연잉군을 지지하던 입장이었다. 심지어 경종이 즉위하고 아직 왕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왕위까지 물려주라고 나서다가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친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영조가 즉위하고 펼친 탕평이라는 것도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을 중심으로 조정의 균형을 맞추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었다. 물론 노론도 흔히 아는 것처럼 악의 온상 같은 것은 아니었고, 경종과 사이가 나쁘기는 했지만 숙종이나 영조 등과는 협력관계에 있었다. 심지어 숙종은 노론과 손잡고 세자이던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연잉군이 노론과 대립한다?

 

그런데 재미있다. 실제 역사와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시피 한데 어찌되었든 드라마는 재미있다. 확실히 드라마는 재미가 전부인 모양이다. 역사와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올 때마다 피식피식 웃다가도 드라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방계인 밀풍군이 감히 왕의 아들인 연잉군에게 반말하는 것이며, 신하가 감히 왕과 맞상대하는 것 등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지만 어차피 이름만 같을 뿐 역사와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나라에 가상의 인물들이라 여기면 그만이니까.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뿐 역사와 전혀 상관없는 단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장미전쟁에서 모티브를 얻은 판타지소설 '왕좌의 게임'처럼. 잠시 헷갈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역사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머니까.

 

주연들의 연기나 주인공들의 매력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연잉군은 과거 '해를 품은 달'에서의 불운한 왕자의 캐릭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하필 그때도 배우는 같은 정일우였을 것이다. 그 밖의 캐릭터들도 다른 사극들에서 질리도록 보아 온 것들이다. 전형적이어서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매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편하다. 이런 내용이겠구나. 이런 구도겠구나. 다만 그런 설정과 구도들이 만들어내는 사건 자체는 재미있다. 역사를 깡그리 무시해도 그럴만하겠구나 여길 정도로. 작가의 힘인가? 감독의 역량인가? 생각보다 재미있어 놀랐을 정도다. 더 지켜보려 한다. 월화에 기대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