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 미묘한 블록버스터
일단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아주 마음대로 적당히 뒤섞은 느낌이었다. 일단 세자의 캐릭터는 광해군과 사도세자, 정조의 클리셰를 적당히 섞어 만든 듯 보였다. 여기에 세도정치까지 끼얹으니 뭔가 그럴싸 해 보인다. 물론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다. 광해군의 세자지위를 흔든 것도 선조 자신이었고, 사도세자를 죽인 것 역시 친아버지인 영조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정종을 제외하고 조선역사에서, 심지어 세도정치 시대에도 저런 식으로 신하들에 무시당한 왕은 없었다. 당연히 세자가 감히 왕위를 노리고 모의한 역사도 없었다.
아마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조선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소빙기였다고 하는데 덕분에 가까운 일본이며 중국까지도 기후변화로 수확량이 감소하며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있었다. 당연히 굶주림으로 면역이 약해지면서 전염병까지 돌아서 임진, 병자의 전란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었다. 심지어 지배층으로써 충분한 부와 인적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던 왕족들마저 적잖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당시 조선사회가 입은 피해는 컸다. 굳이 좀비가 아니더라도 하마트면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무너뜨릴만한 괴멸적인 피해였었다. 아마 그를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당시 지배층인 양반들이 그렇게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무책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양반들마저 굶어죽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이 백성들로부터 수취했던 양 자체가 세계적인 기준으로 그다지 많지 않았던 데다가, 그나마도 구휼하네 뭐하네 이리저리 써 댄 탓에 지배층이 확보하고 있던 양 자체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나름대로 조정이나 지방의 관리들도 대책을 세우고 백성들을 살리려 노력도 해 보았지만 수취가 적은 대신 조정의 규모도 크지 않았기에 전근대 조선의 역량으로는 역부족이었었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해도 충분한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로 저 경신대기근의 영향으로 지방의 사림이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조선의 중앙집권이 강화되었다. 토지에 기반한 지방 사족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중앙의 벌열들이 관직을 독점하며 이후 세도정치의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더이상 영남에 기반을 둔 남인과 소론이 노론과 경쟁할 힘을 잃으면서 조정은 노론 일변도가 되었고, 그런 노론을 경계한 영조에 의해 처음으로 척신을 등용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정치 시기에 이르면 지방에 남은 향반이나 잔반들은 인근에서나 양반으로 행세할 뿐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앞에서는 그저 일반 백성과 똑같은 수탈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상당수 양반들이 농민의 편에서 봉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무튼 그런 사소한 배경이야기는 뒤로 하고 그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좀비라고 하는 장르와 정치드라마를 절묘한 균형으로 쌓아올린 느낌이었다. 아무튼 역사드라마라면 흔히 나오는 클리셰이기는 하지만 미약한 왕권과 그로 인해 위협당하는 세자와 왕실을 위협하는 권신의 구도는 너무 낯익다. 하지만 세자의 캐릭터가 약간 다르다. 그런 현실을 자신의 힘으로 뒤바꾸고자 유생과 대신들과 손잡고 반역을 모의한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병이 도는 영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후부터 좀비라는 장르가 그런 클리셰를 뒤흔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문경을 사이에 두고 군대가 아닌 역병에 걸린 좀비를 배경으로 세자와 조학주가 대치하는 듯한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남의 역병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세자를 죽이기 위해서 조학주는 관군을 동원해 문경을 틀어막고 음모를 꾸미며 관문 너머의 세자를 노려본다.
좀비에 대한 설정도 색다르다. 날이 어두우면 일어나 날뛰고, 해가 뜨면 어딘가 숨어들어 잠든다. 정확히 날이 추워지면 날뛰고 날이 따뜻해지면 서늘한 곳을 찾아 숨는다. 그러니까 겨울 한정이라는 것이다. 겨울이 끝나면 끝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신대기근 당시 소빙기였다는 것이 걸린다. 말이 평균 1도의 온도가 낮아졌다는 것이지 매일 단위로 보면 그마저도 불안정하기 일쑤다. 무엇보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 재앙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총이 아닌 활과 칼로, 좀비가 무언지도 모른 채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역시 좀비라는 클리셰에 익숙해진 시청자에게도 남다를 것이다. 조선이라는 색다른 배경과 좀비라고 하는 어쩌면 전혀 어울려 본 적 없는 소재가, 궁중의 암투와 함께 단단하게 엮인다. 처음에는 제법 지루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것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캐릭터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세자도, 의녀 서비도, 착호군 영신도, 조학주 역시 흔히 드라마에서 보아 오던 캐릭터들이다. 좀비만 아니었으면 바로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아니 좀비만이었어도 더이상 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필 역사드라마 같지도 않은 해치까지 중간에 끼어서. 그런데 이것 저것 다 섞고 나니 이게 제법 볼 만해진다. 좀비가 쫓아오고, 조정의 권신이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 그런 가운데 이런 모든 위기를 타개할 열쇠를 찾아 나선다. 너무 드라마를 오래 봤던 모양이다. 중전이 굳이 임신한 아낙들을 거두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서 벌써 의심부터 하고 있었다. 과연 중전이 임신한 것은 맞을까. 이 또한 새로운 시도다. 어쩌면 조학주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어도 드라마는 재미있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따위 없이도 역사적인 재미 정도는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의 역사를 떠올리면서, 실제의 사실과 비교해 보면서, 그러면서도 드라마가 보여주는 디테일을 충분히 즐기면서. 하나같이 죄다 클리셰 투성이인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새롭기까지 하다. 짧은 분량에서도 호흡이 늘어지는 듯 느껴지는 것은 가장 크게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무려 3주가 걸렸다. 6편 다 보기까지. 내 취향이 좀 남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참 미묘하다. 여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