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별책부록 - 일하는 여성들의 드라마
이런 드라마야 말로 페미니즘 드라마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일에 열심인 여자들이 아름답다. 굳이 남성과 적대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배려와 양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착실하게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내고 모두로부터 인정받는다. 남성이고 여성이기 이전에 그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료이고 동지일 터다. 하긴 아주 일부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나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을 뿐 대부분 그렇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함께 어우러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하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송해린이 좋은 이유다. 사랑과 일 모두를 훌륭히 양립시킨다. 사랑도 일도 최선을 다하며 무엇 하나 소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개인의 감정과 일을 혼동하는 모습은 전혀 없다. 일 앞에서 그녀는 프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이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며 울던 것이 언제인가 싶게 회사에서는 다시 자기 일에 철저한 송대리로 돌아가고 있다. 당장 지서준과 감정적으로 대립하다가도 지서준의 제안이 옳다는 판단이 서자 더 이상 체면도 자존심도 뒤로 한 채 오로지 더 나은 가능성에만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차은호를 형한 감정들은 더없이 순수한 것이었다. 순수와 열정이야 말로 그녀를 위한 단어들이 아닐까. 차은호는 실수한 것이다. 이런 멋진 여자를 놓치다니.
확실히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랐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만두를 빚어 파는 부모님으로부터 프로란 어떤 것인가 제대로 보고 배우며 자랐다. 단 하나라도 자기가 납득할 없는 제품을 손님에게 돈받고 팔 수는 없다. 아니 돈받고 파는 것이 아니더라도 손님에게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귀한 만둣집 딸은 항상 터진 만두만 먹고 자랐다. 차은호에게 차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오히려 차인 당사자인 송해린이 당황할 정도로 앞장서서 화내며 편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리 쉬운 모양이다. 비틀리거나 꼬인 곳 없이 일이든 사람이든 올곧게 바라 볼 수 있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어째서 송해린은 그토록 올곧고 강하고 순수할 수 있었는가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지켜 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 자신의 일에 열심인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해린의 진심어린 분노가, 그리고 그만큼이나 침착하고 차가웠던 차은호의 질책이 아직 아무 자각도 없던 송지율을 일깨운다. 비로소 눈을 뜨고 주위를 보았을 때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깨닫게 된다. 그래도 아주 구제불능은 아니다. 외면하고 도망치기보다 그래도 자신의 자리와 역할에 충실하려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인다. 단지 그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고 가져 보지 못한 다짐이라 시간은 조금 걸릴 듯하다. 하긴 처음부터 잘하면 신입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강단이는 그래서 특별한 경우다. 신입 아닌 신입일 테니.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고 곤란한 사정이 있든지간에, 그런 사소한 개인의 사정과 일은 철저히 분리된다. 지서준이라는 사람이 좋고, 그러면서도 자기를 좋아하는 차은호가 신경쓰이고, 그래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회사에서는 오로지 일에만 열심이다. 강단이가 결혼 전 하던 일의 흔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때도 나름대로 상당히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런 성공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모두로부터 인정받았던 만큼 이번에도 역시 모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모할 정도로 열심이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이다. 그런 강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좋은 동료들이 있다. 생각한 그대로였다. 고유진이 강단이를 다그친 것은 단지 그녀가 섣불리 들떠서 자기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그녀도 어느새 강단이를 동료로서 인정하는 듯하다. 아마 그런 것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싶은 어쩌면 좌절하고 포기한 많은 여성들을 위한 판타지가 아닐까. 그런 강단이를 지서준과 차은호 같은 멋진 남자들이 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이번 회차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서로 격의없이 친구라 부르는 서영아와 강단이의 모습에 혼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툴툴거리는 고유진 이사의 모습이 아닐까.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하고 철저하지만 그러나 사생활에 있어서 사랑도 친구도 없는 외로운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주 술먹고 서영아, 강단이들과 신세한탄을 쏟아내며 펑펑 눈물을 쏟던 모습이야 말로 진짜 고유진의 모습이 아닐까. 역시 일과 사생활은 분리할 줄 안다. 겨루출판사 직원 모두가 그렇기는 하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모습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기도 하다. 차라리 이 부분만 똑 떼어 여성직장드라마로 내보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예 다른 드라마인 양 회사 밖에서의 사생활과 색감도 밝기도 느낌도 전혀 다르다. 그래서 더 좋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로 인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때로 그로 인해 상처입고 눈물흘리면서도, 사무친 외로움에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면서도, 서로 다른 사연과 사정들을 가진 채 그들은 직장이라는 전장에 모인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직장생활의 이면이다. 그들의 사생활 이면에 그들이 모이는 직장 겨루가 있다.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상들과 대칭을 이루고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사랑하는 그들을, 일하는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며 그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책들 만큼이나. 매 순간 그들은 모든 시간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모습이 더없이 멋지게 보인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