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 합리적인 결정, 영세한 중소기업의 현실

까칠부 2019. 3. 11. 10:49

어쩔 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자기 자리가 없다. 회사 어디에도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 하긴 그래서 어설프게 경력이 있으면 다시 취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많은 사업장에서 나이 많은 신규사원을 뽑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 직원들이 너무 불편하다.


차라리 스펙을 올려서 지원했다면 한 번 피식 웃고 넘겼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계약직이니까. 어차피 자기들과 다른 비정규직이니까. 하지만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층을 두는 것에 익숙하다. 그냥 같은 직장 동료가 아닌 자기와 비교도 되지 않는 학력과 경력을 가진 누군가다. 그리고 전까지 웃으며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에서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계약직, 비정규직이 된다. 이 두 가지가 더해지며 편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그냥 회사에서 타인이 되어 버린다. 어제까지 동료라 친구라 여겼던 이들이 그렇게 낯선 타인의 얼굴이 되어 자신을 회사에서 떠밀어낸다. 과연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 굳이 입사시험을 봐야 한다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다. 워낙 낯을 많이 가리는 한국사회에서 스스럼없이 동료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련이 필요하다. 시련은 가혹할수록 좋고 엄격할수록 좋다. 그래야 그 시련을 함께 거치고 들어온 자신들의 동질성도 강화할 수 있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회사에 들어온 뒤에도 어느 대학 출신인가를 두고 또 갈리는 것이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단이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자신들과 함께 일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 결론내린 이상 강단이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


정말 그린 것 같다. 작가가 이런 분야에 관심이 아주 많은 모양이다. 한 눈에도 도대체 이런 출판사에서 어떤 책들을 출판할까 의문부터 들었다. 공사의 구분도 불명확한 말 그대로 가족기업이다. 남편이 사장이고 아내가 재무담당이다. 회사의 일이라는 게 사장 아들의 선거홍보물을 작성하는 것이다. 워낙 작은 회사이니 대금독촉전화는 기본이라 과연 월급은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의심부터 든다. 어째서 많은 구직자들이 일자리가 없아 못살겠다 하면서 정작 사람 없어 난리인 중소기업으로는 가려 하지 않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런 작은 회사라도 경력을 쌓으면 더 나은 회사로 옮겨 갈 수 있다.


확실히 고유선 이사는 엄격하지만 합리적인 사람이다. 사장 김재민과의 사이에 미묘한 감정선이 상당히 뜬금없기는 하지만 이력을 속인 강단이에 대한 처분은 매우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력을 속이고 들어왔으니 계약을 해지하고 내보낸다. 다만 회사에서 그동안 보여온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해서 그녀를 위한 다른 길을 열어준다. 자신의 능력과 재량 안에서 회사밖에서 그녀를 위한 다른 직장을 알아봐주고 추천도 해준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으면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수 있게 추천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차은호와 서영아 팀장이 그랬던 것처럼 겨루에서도 경력자를 뽑게 되면 강단이와 다시 일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에게 좋은 최선의 선택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강단이가 일하게 될 회사가 영세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그린 듯 보여준다면 고유선 이사는 합리적인 경영자의 모습을 그린 듯 보여준다고나 할까.


진입장벽이 낮은 만큼 다른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영세한 중소기업은 업계에 대한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나름의 기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오래 일해봐야 급여나 대우가 더 좋아질만한 여력도 없을 것이기에 기회가 되면 다른 더 나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수 있다. 아마 사장부부의 말은 진심이며 현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해보고 기회가 되면 더 좋은 곳으로 옮기라. 회사는 자기들만 있으면 된다. 다만 현실에서 계약직과 정규직처럼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도 엄격한 신분의 벽이 있어서 고유선과 같은 특별한 인맥이 없는 이상 그 주변만 계속 맴도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의 벽만 조금 허물어도 당장의 실업문제 가운데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단이는 큰 기회를 잡은 것이다. 고작 1년, 그러면 출판업계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고유선이 그녀를 위해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아무튼 그동안 지서준이 그토록 차은호의 스승이기도 한 작가 강병준에 대해 집착해 온 이유가 슬슬 밝혀지기 시작한다. 강병준의 소설 제목이 지서준의 생일과 같은 4월 23일로 원고지상태에서 바뀐 것부터 그 단서가 되어 주고 있을 것이다. 하긴 대부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출생의 비밀이란 특히 한국드라마에서 너무 흔한 소재라서. 그리고 어느새 불편하고 성가시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송해린과의 관계 또한 예정된 그대로 어설프게 얽혀간다. 이제는 송해린도 스스럼없이 차은호에게 강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술버릇 나쁜 것만 빼면 일도 열심히 잘 하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훌륭한 아가씨인데. 그래도 마지막까지 회사에서 강단이의 편을 들어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설마했지만 과연 고유선 이사와 김재민 사장 사이에도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가. 강박인 것 같다.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덕분에 박훈과 오지율의 관계도 예정한대로 심상치 않다. 강단이와 차은호, 고유선과 김재민, 송해린과 지서준, 오지율과 박훈, 그리고 봉지홍과 서영아의 재결합일까? 굳이 그런 사소한 사족같은 건 없어도 좋을 것 같지만.


그나마 규모가 있던 겨루에서 아주 작은 영세출판사로 강단이가 옮겨가며 풍경이 바뀐다. 고단해진 현실에 대한 보상인 듯 강단이와 차은호 사이의 분위기도 화사해진다. 과연 영세출판사에서 강단이가 겪게 될 또다른 현실의 모습은 무엇일까. 로맨스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다.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