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 각설이 타령과 겹쳐 들리는 5월의 노래
방영일이 하필 518이라는 사실을 제작진이 상당히 의식한 듯하다. 약자의 싸움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약자들이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당장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겨야 한다. 그럼에도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 그런 절박함이다. 그런 처절함이고 치열함이다. 그렇게 약자들은 누군가의 시체를 딛고, 자신의 시체를 제물삼아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어째서 황석주와 백이현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을 부정하고 그런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끝내 그를 합리화하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이것이 옳다. 그동안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잃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지켜야만 했었다. 자신의 가문을. 자신의 명성을. 자신의 자존심을.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었는가. 단지 도망치고 숨고 싶은 자신의 비겁함을 다른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려 한 것은 아니었는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관리를 벤다. 임금의 말은 곧 임금 자신이다. 임금의 말을 전하는 관리 또한 임금의 대신이다. 관리를 베는 것은 임금을 베는 것이다. 진짜 역적이 되는 것이다. 자칫 자신들의 봉기가 실패하면 역적이 되어 가족까지 큰 곤경을 겪게 될 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야 했다. 이대로 여기서 멈춰설 수는 없었다. 죽어간 이들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뻔히 죽을 줄 알면서 그 길을 갔던 이들이 있었다. 정말 한심할 정도로 어이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서로 뒤엉키는 흔한 액션조차도 없었다. 맨손 맨몸으로 그저 관군이 휘두르는대로 칼에 맞아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그토록 하찮게 내버렸던 것일까. 살고자 간 길이 아니라 죽으려 갔던 길이었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나가도. 바로 앞에서 내 형제 내 친구 내 이웃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그 빈 자리를 채운다. 누군가는 그 빈 자리를 대신하며 앞으로 나간다. 각설이타령은 그들의 한이며 신명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울 수 없기에 노래를 부른다. 차라리 화내며 원망할 수 없기에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차라리 절망하며 주저앉을 수 없기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러니까 하필 5월 18일이었던 것이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광주에서 똑같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 이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시체를 자양분삼아 새로운 세상을 꽃피웠던 이들이 있었다. 도대체 얼마였을까. 그동안 이 뭣같은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흔린 피와 스러진 시체가 도대체 얼마였을까. 그래서 지금 노래와 함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죽어갔던 이들은 지금에 이르러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잃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했지만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빼앗긴 것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했다. 당당하지 못했다. 백이현의 항변은 옳다. 백이현은 분명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황석주는 그런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음모를 꾸몄다.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던 제자를 배신하고 평소 자신의 신념과 주장들까지 부정한다. 뒤늦게 후회해 봐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자신에 대한 끝없는 환멸과 혐오가 더욱 그를 극한까지 몰아붙일 뿐이다. 그나마 백이현의 자아는 황석주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의 신념이란 아직 여물지 못한 이른 봄 서리마냥 허무하기까지 하다.
서로를 원망하며 그리고 자신을 증오하며 그렇게 그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며 서로를 물어뜯으려 한다. 아버지 백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백가보다도 더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선택은 그래서 더욱 모든 것을 내던진 민초들의 싸움과 대비된다. 딱히 동학을 깊이 믿어서가 아니었다. 백이강은 처음부터 동학을 믿지도 않았고 믿을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동학의 교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들이 의지할 것은 동학의 주문 몇 자 뿐이었기에.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은 자신마저 제물로 삼아 앞으로 나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마저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처참한 승리를 그래서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누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가는가. 아무것도 잃으려 하지 않는 이들과 모든 것을 걸어야 했고 걸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각설이타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과 겹쳐들린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황룡촌 강변이 광주 금남로와 겹쳐보였다면 그저 내가 잠을 못자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일까? 그래도 동학군은 경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잠시 역사는 잊는다. 이후 벌어질 참혹한 역사의 결말은 잠시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다. 저들이 승리했어도 온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리 믿을 수 있기를. 역사는 아직 과정에 있다. 풀잎은 짓밟혀도 아름답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