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근로감독관 조진갑 - 노동자의 아들과 노동자의 아버지, 그 불편한 진실
결국 이것이 본질이다.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노동자는 남이 아니다. 내 아버지고 내 자식이고 혹은 내 주위의 누군가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 사실을 잊는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애써 아버지를 부정하며 살아왔었다.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아버지와 똑같이 속이고 이용하고 저버리면서. 그러니까 그 잘나신 판사, 검사, 변호사 가운데도 누군가는 노동자의 자식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장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용자 가운데도 자신이 노동자이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자식 가운데 노동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문제가 단지 나와 상관없는 남의 문제이기만 한가.
재벌의 수족이 된 변호사 우도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다. 그것도 사업장의 문제를 보고했다가 부당해고당하고 그로 인한 사고의 책임까지 죽은 뒤에 온전히 뒤집어써야 했던 억울하고 불행한 노동자였었다. 하지만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고 혼자서 오해한 채 원망만 하며 살았었다. 누가 우도하에게 진실을 감추었는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었다. 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언론이었고 세상이었다. 노동자가 너무 많은 돈을 받고 너무 많은 것들을 누리려 하니 기업이 망하고 경제가 망하고 마침내는 나라까지 망한다. 고작 노동자 몇 죽거나 다친 것 가지고, 고작 위험물질 좀 누출되고 사고 좀 일어난 것 가지고, 법을 좀 어겼다고 온통 따지고 문제삼으면 기업들이 제대로 경영도 못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기업들이 외국으로 나가려는 것 아닌가. 그토록 수많은 서민들까지 주문처럼 외워대는 규제완화란 무엇인가. 화학물질관리와 관련한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일간지 1면에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은 무엇이고 위험은 무엇인가. 하지만 과연 언론이든 정부든 수많은 지식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제대로 이야기해주고 있는가.
결국 자기 자식의 일이 되니 구대길도 돌아서고 만다. 구대길 자신도 노동자였었다. 그랬기에 더 노동자에게 가혹했던 것인지 모른다. 누구보다 노동자의 처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다시는 자신이 그런 노동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루하고 비참하고 위험하다. 일하다 사고를 당해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살리려는 노력은 커녕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려 감추는 데 급급하다. 어떻게든 임금까지 떼어먹고, 안전은 도외시한 채 늦게까지 쥐어짜듯 노동자들에 일을 시킨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은 그런 곳에서 일하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 자신은 자본가의 편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야 한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아들까지 위험에 처하는 것을 직접 보고야 만다. 자신이 도왔던 양인태로 인해 위험한 환경에서 늦게까지 일하던 아들이 하마트면 죽을 뻔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계속 눈감고 참을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 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생활조차 불가능한 저임금의 노동자들이 오히려 임금인상에 반대하고, 일주일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매여 있어야 하는 이들이 또한 근로시간 단축에 반대하며,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근로환경개선에 대해 부정적이다. 당장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나 이웃 가운데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에도 노동자는 당연히 낮은 임금을 받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며 더 위험한 환경에서 나라와 경제와 무엇보다 기업을 위해 묵묵히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기업의 이익이 줄 것을 걱정하면서 혹시라도 기업승계에 문제가 생길까 사주 자식들의 상속세까지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부동산만 몇 채를 가진 사람들의 세금이 당장 최소한의 생활비마저 부족해서 빚을 지고 쫓기는 처지가 된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 보도를 내는 언론의 책임일까? 아니면 무비판적으로 믿고 마는 대중의 잘못일까? 우도하라면 그래도 변호사로써 유능한 만큼 많이 배웠고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이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도지사후보 TV토론은 그야말로 막장의 극치였다. 더구나 거의 현실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실에 기반했다는 사실이 더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심지어 양인태가 했던 대부분 발언은 전직 두 대통령과 대통령자리를 넘보던 유력 정치인들에게서 나왔던 것들이었다. 이렇게까지 현실정치가 엉망이었는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양인태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이 자신의 지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불법과 부정과 비리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투표하여 당선케 할 것이다. 도지사만 되면 이 모든 문제들을 덮을 힘을 가지게 된다. 과거에도 실제 그랬었다. 그렇게 선거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힘을 사용해 모든 문제들을 덮었던 경우가 실제 있었다.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양인태 한 사람만의 문제인가.
무사안일의 극치이던 공무원들까지 사실은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뿐이다. 어차피 자신들이 열심히 해봐야 들어주는 것도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다. 어차피 되지 않을 일에 열심인 사람은 조진갑 같은 바보 말고는 없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 조진갑같은 바보는 도태되어 사라진다. 당장 드라마의 주인공임에도 조진갑이 겪었던 위기가 도대체 몇 번이었는가. 그때마다 조진갑이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도 같은 우연과 주위의 도움 때문이었다. 합법적인 수단만으로는 안되었기에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해야 했었다. 영웅이 아닌 반영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겨우 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무사안일에 빠졌던 공무원이며 보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검사까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해내기 시작한다.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하지만 결국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공범이었다. 피해자가 아니었다. 구대길이 그랬던 것처럼 조진갑의 아버지도 당시의 진실을 은폐하여 우도하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가게 한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어쩌면 불편한 주제일 것이다. 노동자의 자식이, 노동자의 아버지가, 노동자인 동료와 노동자였던 자신이 결국에 모두가 공범이 되고 있었다. 노조를 저주하고 증오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행위를 혐오하는, 그러면서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경멸하는 그들 모두다. 어차피 노동자란 그 정도 돈과 그만한 대우나 받으면 그만인 존재들이다. 더 많은 임금도 더 많은 휴식과 여가도 그들에게는 독이 될 뿐이다. 우리 사회의 굳건한 믿음이다.
유쾌한 코미디인데도 마냥 웃으며 볼 수만 없는 이유인 것이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조진갑의 통쾌한 승리마저도 한없이 우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자의 임금이 올랐다고 부당하게 해고하는 행위마저 정당하다 모두가 응원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고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해고하는 것이 옳다며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너무나 정의로운 대중의 여론이란 것이 그렇다. 사주의 잘못으로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어째서 노동자가 그 책임을 지고 해고되어야 하는 것인가.
승리없는 승리다. 현실을 알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승리 아닌 승리들이다. 현실이라면 이대로 묻히고 사라진다. 양인태는 승리하고 오히려 조진갑이 대중의 비난 속에 사라진다. 드라마로만 좋다. 언제나. 슬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