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 과연 녹두장군, 리더의 책임과 무게를 느끼며
자신의 말 한 마디가 가지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지도자가 있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더 큰 비극은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국민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책임은 국민 자신이 져야만 했었다. 차라리 낫지 않은가. 그래도 전제왕조이고 신분제 사회니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탓만 하면 되었으니. 민주주의란 원래 인간의 본성과 상당히 배치되는 제도다. 인간의 이성이 아닌 본능은 원래 민주주의와 맞지 않다.
다른 사람의 위에 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고 책임을 나눌 수도 없다. 온전히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 책임까지 자신이 져야만 한다. 물론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 동의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를 아우르며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의 위에 선 자신의 몫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결정에 의해 수많은 사람의 운명까지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무게를 감히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차라리 회피하거나, 아예 거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리기도 한다. 남의 위에 있다고 모두가 그에 어울리게 행동한다면 민주주의가 왜 필요했겠는가.
자신의 명령 한 마디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피흘리며 누운 사람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수많은 바람들이 오로지 자기 한 사람을 향한다. 진짜 역사의 전봉준도 이러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배우 최무성의 덩치가 큰 것이 아니라 그냥 전봉준이란 인간이 커 보이는 것이라고. 그것까지 고려한 캐스팅이 아니었을까. 매 순간의 리더로서의 고뇌와 갈등과 번민이 저 깊이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판단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누군가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누군가는 기뻐하겠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어떤 결정을 내리든 따르겠다는 그 말은 그보다 더 아프다. 과연 지금 자신의 결정이 저들을 위한 최선일 것인가. 자신이 지금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는 것인가.
보리가 여물어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면 귀한 보리가 그대로 땅에 떨어져 썩고 만다. 땅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차라리 땅이 하늘이고 부모고 자식이었던 이들이다. 그것이 농민들이다. 그런 농민들이 살아보자고 일으킨 봉기였다. 다시 땅의 주인들을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살아서 다시 생명을 일으키도록. 다시 땅을 일구고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그래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들의 땅을 배신해서는 안된다.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꽃이 피고 이삭이 패이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농부의 마음으로. 순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을 때 과연 아직 녹두꽃은 피지 않은 것인가. 아직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까지 뜨겁게 들끓지 않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비겁하기보다 간절해진다.
운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피지 않은 녹두꽃처럼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세상도 사람들의 마음도 아직 완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의지를 받아들이기에 아직 모든 것이 너무 부족했다. 조선은 너무 약하고 청과 일본이라는 외세는 너무 위협적이다. 조선을 온전히 바꾸기에도 조선이라고 하는 현실은 너무나 취약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더욱 궁지로 내몰기에는 그런 조선과 백성의 현실이 너무 가엾고 안타깝기만 하다. 다음에는 때가 있을까. 언젠가는 그 때가 돌아올까. 녹두꽃이 피듯 녹두가 여물듯 그런 때가 돌아올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군가는 씨를 뿌려야 하고 누군가는 꽃을 피워야 하고 누군가는 열매를 맺게 해야 누군가는 그것을 거둬들일 수 있다. 차라리 자신이 그를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매마른 밭에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누군가는 그 위에 썩어 거름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빚을 지며 살아가는 이유다.
전봉준만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 최무성만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역시나 드라마의 주제가 동학농민전쟁인 때문이다. 아무리 백이강과 백이현 형제가 날뛰어도 드라마의 중심은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실패한 혁명이었을 것이다. 그를 무대로 그를 배경삼아 백이강과 백이현 형제도, 송자인이나 황명주도 저마다 자신의 꿈을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서로 부딪히며 날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고민과 인간의 고민과 그리고 결정된 역사의 비극이 그 단 한 인물에게 집중된다. 어째서 리더인가. 무엇이 지도자인가. 남의 위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 자격과 책임에 대해서. 어째서 녹두장군 전봉준이었는가. 당시 수많은 동학지도자 가운데 단 한 사람 그 이름만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유를 들려준다.
참고로 당시 전봉준에게는 백이강의 말과 달리 딸이 둘이나 있었다. 아들도 둘이었는데 죽었거나 행방을 알 수 없고 딸 가운데 후손이 있어서 지금 전봉준의 제사를 모시고 있을 것이다. 다만 백이강과 이어주기에는 당시 딸들의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았을까.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다. 한창 무게잡다가도 어느새 허튼 이야기로 피식거리고 마는 것은 과연 한국드라마구나 싶다. 해학이란 것이다. 차라리 울 수 없어 웃고 아파할 수 없기에 즐거워한다. 그만큼 삶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운명의 무게란 것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이것이 자신이 꿈꾸던 길인가. 자신이 걷고자 했던 길인가. 복수에 미쳤다. 전장에 취해 미쳐 있었다.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황석주는 아직 잔혹한 고문에 전장의 공포에 미쳐 있는 중이다.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나약해질 수 없는 이들. 그럼에도 강해지고자 하는 이들과 강해질 수 없는 그들이 하나의 시대를 살아간다. 과연 백이현은 새로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백이현의 길마저 혹시나 역사의 비극이지는 않을까. 모두가 자신의 길을 찾아 걸을 수 있었으면. 유혹이 던져진다. 백이현이 진정 찾고자 하는 자신과 자신의 길은 무엇일까. 그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결국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다. 시대에 남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의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