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 역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전쟁의 전야
복선일지 모르겠다. 구한말 조선을 바꾸고자 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오히려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배를 앞장서서 받아들인 이유였을 것이다. 더이상 조선에는 희망이 없다. 일본의 지배라도 받지 않으면 조선에 미래는 없다. 조선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앞서 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의 지배를 통해 그것을 배워야 한다. 조선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많은 친일파들이 양산되고 있었다. 바로 문명의 힘이다.
가끔 역사드라마를 만들면서 전주 이씨 종친회로부터 돈이라도 받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때가 있다. 조선의 왕권이라는 것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약하지만 않았다. 오히려 정종과 단종을 제외하고 조선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왕이 하고자 해서 하지 못할 일이란 거의 없었다. 조광조도 중종이 죽였고, 기축옥사도 선조가 키웠으며,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척족인 여흥 민씨를 앞세웠던 것도 바로 고종 자신이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군을 끌어들인 것도 고종 자신이었다. 아무리 나라가 막장이라고 왕이 허락도 안했는데 일게 초토사따위가 외국군대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이후 일어날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부분 전쟁에 동원된 청군이 청의 권신 이홍장의 사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 한 이홍장이 아예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할 것을 지시한 바 있었다. 원래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혈통에 의한 계승 말고 어떤 합리성도 정당성도 없는 전근대의 권력이란 더욱 그러했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탱해 줄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최대한 자신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 줄 지지세력을 확보해야만 했었다. 조선에서 그런 힘을 가진 이들이 누구이던가. 세조가 찬탈에 성공하고 가장 먼저 한 것도 그래서 중앙에서는 무차별적으로 공신에 책봉하여 상을 주고 지방세력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강화할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한양의 벌열들과 지방의 사족들이야 말로 황석주의 말마따나 조선의 힘이고 근본이었던 것이다. 과연 고종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강화하려 한다면 누구의 편에서 개혁을 이끌어야겠는가.
고종이 끝끝내 조선의 개혁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였다. 조선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고종은 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기 보다 체제를 유지하며 그저 무기와 같은 이기들만을 받아들이는데 급급해 있었다. 그 무기를 사용해서 백성들의 저항을 억압하며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명성황후 민씨는 바로 그런 고종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보다 더 적극적이고 과감했으며 단호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명성황후 민씨의 모든 판단과 결정은 고종의 동의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조선이 망한 데는 고종의 책임이 절대적이었다. 척족 민씨 일가가 저지른 모든 부정과 전횡과 부패 또한 고종의 용인 아래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드라마만 보고 있으면 고종이 그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고종이 멍청하고 무능한 것은 맞지만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니 그렇더라도 결국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고종 자신이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조선을 바꿔보고자. 그러나 너무 늦었다. 더구나 전혀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종이 힘을 잃고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각지에서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학교도 세워지고 회사도 세워지며 아래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마저도 용인 못한 것이 바로 고종의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종의 그릇이 다시 청에 기대고자 하는 나약함으로, 일본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않은 무능함으로 나타난다. 하긴 미화한 것도 아닐까.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주변에 끌려달리는 우유부단한 모습이니. 명성황후 민씨의 모습은 탐욕스럽고 표독스러운 실제의 그것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은 그냥 권력에 미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
당시 한양을 지키던 병사들의 무기가 아주 빈약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기만 놓고 보면 일본군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었다. 평양출신의 병사들은 일본군과도 대등하게 교전을 벌였을 정도였다. 무능한 것은 고종과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뻔히 일본의 야욕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않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어떤 무기도 군대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군사력이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그런 조선을 보며 과연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혁명의 그늘을 보여준다. 하긴 해외에서도 시위가 벌어지면 흔히 보게 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괜한 거리의 가게들을 부수고 약탈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길가에 세워둔 자동차에 불을 지르며 온통 거리를 혼란으로 몰아간다. 혁명이란 바로 세상을 뒤집는 것이다. 바꾸는 것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권력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어제까지 비천한 신분이던 이들이 고귀한 신분에 있던 이들의 위에 서게 된다. 오히려 자신의 생사를 결정하던 이들의 생사를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생을 권력 속에 살았어도 권력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권력과는 전혀 인연도 없던 이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오로지 바르게만 쓸 수 있을 것인가. 마음껏 죽이고 부수고 약탈하고 그마저 자신들의 권리라 여기게 된다. 혁명은 오염되고 그리고 결국 반발을 부르게 된다. 차라리 김개남의 말처럼 세상 전부를 바꾸고자 했었다면. 하지만 이미 당시 동학군은 경군이 가진 근대적인 무기 앞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은 백이현이 저지른 죄악이 업보로 돌아온 것이었다. 백이현에 대한 원한이 명심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명심에게로 향하는 김가의 복수를 백이현은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리고 한양에서 다시 만난 백이강과 송자인의 앞에는 어떤 현실이 또다시 나타나게 될 것인가.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그러나 내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군상들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시대이기도 하다. 백이현은 선택해야 한다. 백이강도 역사의 한가운데 선다.
역사란 무엇인가. 개인이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고보면 '미스터 션샤인'이 보여준 것이 그런 것이었었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과 그렇기 때문에 더없이 처연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스러지는 꽃들처럼. 그럼에도 끝내 떨어져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잡초들처럼. 그 열매로 사람을 살리는 녹두꽃처럼. 그 끝을 알기에 차마 보고 싶지 않음에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생각만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