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 드러난 도깨비의 정체와 스스로 오니가 된 백이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한 마디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가난한 하류계급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은 경우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너무 멀면 가다가 지친다. 힘이 떨어지면 길을 잃고 결국에 주저앉고 만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우면 굳이 움직일 생각을 못하게 된다. 왕을 만나고 왕비를 만나며 어느새 조선이라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백이강과 송자인이 그런 경우다. 왕이 곧 조선이고 왕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조선을 지키는 것이다. 한양의 화려함 속에서 그들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하고 만다.
어째서 하급무사였을까. 어째서 상인이나 농민, 천민들이 아니었던 것일까. 오히려 바쿠후를 지키겠다고 나섰던 신센구미는 무사를 동경하던 백성들이 더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으니까. 하급무사라고 모두 처음부터 차별받는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쩌면 전쟁에 패한 다이묘였고 유력다이묘의 유력가신이었다. 바로 한 걸음만 내딛으면 세상을 뒤집고 자신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두 번 가운데 하나인 쵸슈의 경우 한때 서국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던 모리가의 후예로써 도쿠가와에 대한 복수심에 더 적극적으로 막부타도에 나섰던 면이 적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양이였었다. 조정을 중심으로 뭉쳐 막부를 타도함으로써 무도한 서양의 오랑캐들을 몰아내야 한다. 이후 전쟁을 통해 서양의 힘을 몸으로 느끼고서야 더 빠른 서구화를 위한 막부타도로 목표를 바꾸게 된다. 첫째는 일본의 근대화가 아닌 막부의 타도, 그리고 그를 통한 신분의 교체였다는 것이다.
전봉준도 양반이라지만 흔적만 남은 잔반이었으니까. 백이현 역시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던 중인의 신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백이강이나 보부상의 딸인 송자인은 감히 조선이라는 넓은 세상과 그를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아예 알 필요조차 없었다. 당장 내 어머니, 내 가족, 내 친구들, 내 동료들, 그들의 세상은 그리 좁았다. 그래서 특히 백이강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와 임금이란 존재는 그저 감정에 기댄 인정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을 어쩌고 임금이 어때야 하고 하는 이야기는 그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다. 전봉준과 한양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백이강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그렇게 대비된다. 양반의 나라 조선에서 양반으로 살아왔기에 그럼에도 황석주는 범궐의 소식에 눈물을 흘린다. 그런 한복판에 중인 백이현이 던져진다. 바로 왕이 머무는 왕성의 근처에서 그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세상을 바꾸겠다. 어떻게? 조선을 문명화시키겠다? 무슨 방법으로? 그래서 신분을 얻으려 했다. 과거를 보고 관직을 얻어 기존의 질서에 편입되고자 했었다. 그것이 모두 허튼 꿈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백이현은 다시 동학에 희망을 걸었었다. 혹시라도 백성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그가 느낀 것은 비열할 정도로 너무나 순수하고 솔직한 그들의 감정과 욕망이었다. 그리고 결코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자신의 한계였다. 자신이 과거 도깨비였다는 사실은 그냥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김가가 오로지 도깨비인 백이현을 잡겠다고만 황명심과의 늑혼을 밀어붙였던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나라와 임금보다 동료를 구하고자 했고, 동지들의 원한보다 형제의 목숨을 우선했던 백이강처럼 역시 백이현도 마지막 순간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내딛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나가야 했다. 멈출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게 가장 고통스런 것은 자기가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되는 것일 터다. 자신이 아는 바를, 자신이 가진 능력을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벨 수 있는 칼이 있기에, 찌를 수 있는 창이 있기에, 더구나 베야 하고 찔러야 하는 대상이 있는데도 감히 그럴 수 없는 현실이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자 공포일 것이다. 차라리 백이현이 조금만 더 무능했다면. 일본으로 유학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고 세상을 바꾸고 있는 문명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었다면. 신분상승은 언감생심 아버지 백가처럼 아전에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면 성품이 바르니 큰 문제 없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장에서 가장 크게 입은 상처가 그것일 것이다. 자신은 아무 존재가 아니다. 무력하고 하찮은 그런 비천한 존재일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를 증명하고 싶어진다. 황석주의 말이 주문처럼 뇌리에 꽂힌다. 이대로 멈춰야 하는가. 이대로 돌아서야 하는가. 갈 수밖에 없다면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아직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민족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기 전이었다. 일본인에게도 일본이라는 나라와 천황이라는 존재가 아직 낯설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조선이니 일본이니 중국이니 하는 나라보다 아시아라고 하는 정체성을 우선하던 시기였다. 삼국이 연합하여 유럽에 맞서자. 삼국이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유럽열강의 침략에 대항하자.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따라서 아시아를 이끌어야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이 외치던 대동아라는 명분은 원래 당시 삼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논의되던 것이었다. 다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 힘을 가지기 전과 가진 힘을 확인하고 난 뒤의 생각도 다르기 마련이다. 기껏 가지게 된 자신의 힘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부러 쓰고자 하는 경우란 현실에서도 매우 드물다. 국가란 단위로 가면 인간은 더 이기적이 된다. 과연 다케다의 선의에 이끌린 백이현의 이후 선택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저격하기 위해 나섰던 안중근의 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따르고자 했던 박영효처럼 그저 대세에 순응하게 될 것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니란 이름처럼 앞으로 그의 길에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힘을 가진 자도, 힘이 없는 자도, 오로지 자신의 이상과 선의만 남는다.
진실이 밝혀진다. 애써 감춰왔던 진실이 마침내 모두 앞에 드러나고 만다. 전봉준이 알았다. 전주성에서 수많은 동학군을 사살했던 도깨비가 백이강의 동생 백이현이었다는 사실을. 백이강이 백이현을 살리기 위해 그 사실을 숨겼고 덕분에 백이현은 동학의 이름으로 집강소의 직강까지 될 수 있었다. 동학을 살해한 자가 동학의 이름으로 동학이 바라던 세상의 변화를 이끈다. 있을 수 없는 사실에 전봉준은 분노한다. 그러나 백이강에게 백이현은 동생이었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천륜이었다. 왕보다 동료 버들을 우선했던 것처럼. 왕을 지키기 위해 당장 거병해야 한다는 대의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 동료들을 속였던 개인의 인정이 우습게도 모순됨없이 어울린다. 이성계니 이방원이니 하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그들의 대의이며 그들의 인정이다.
어쨌거나 그래도 한때는 신분을 떠나 그토록 우애좋던 백가의 부인 채씨와 유월이가 원수처럼 멀어지게 된 계기란 것도 결국 남편 백가가 저지른 죄악에 있었던 것이다. 남존여비의 조선사회에서 남성이었으며, 양천의 신분차별이 엄존해 있던 현실에서 노비인 유월의 주인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감히 내쫓길 수 없으니 남편의 행위를 비난할 수도 없었고,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범한 이의 첩이 되어야 했었다. 차라리 남편의 자식을 낳은 유월을 원망하고, 그나마 자신이 낳은 아들을 향한 백가의 마음에 위안을 얻어야 했었다. 차라리 채씨가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유를 알고, 채씨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유월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어쩌면 왕 고종과 그를 둘러싼 관리와 백성들의 상황과 비슷할 지 모른다. 진짜 원망하고 바로잡아야 할 대상을 따로 있는데. 진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을 것인데. 그런데도 조선이라는 질서를 사이에 두고 황석주와 전봉준은, 그리고 백이현은 서로 대립하고 원망하며 자신과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백성이 백성을 원망하고, 백정이 백정을 미워하며, 양반이 양반을 상처입힌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만들고 있는가.
덧붙이자면 다케다가 약속한 신분이 사라진 사회 같은 건 일제강점기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당장 일본 자신도 보다 수월하게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지배층인 양반들의 협력과 동의가 필요했던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주전호제는 일제강점기에 강화되고 있었다. 지주들의 향촌에 대한 지배는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 영향은 해방 이후에도, 심지어 한국전쟁 이후까지 이어진다. 백정에 대한 차별 역시 한국전쟁으로 신분을 증명할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인이라는 자체가 신분이 되고 있었다. 일본인과 가깝다는 사실만으로 신분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후의 선택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어디까지 자신의 이상을, 자신이란 존재를 지킬 수 있을까. 가장 흥미를 가지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