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 흔들리는 백이현, 속은 것이 아니라 겁먹은 것일 뿐
속은 것이 아니다. 그냥 보지 않은 것이다. 외면하고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무서우니까. 겁나니까. 늘 그래왔었다. 언제나 겁먹은 모습이었었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쫓기고 있었다. 때로 아버지의 악업이, 때로 중인이란 자신의 신분이, 때로 전장이란 현실이,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업으로부터도. 그러면서도 한 번 정면으로 맞설 용기조차 없었기에 항상 도망쳐 다니느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선택을 강요당해야 했었다. 다른 누군가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강요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지금 자신의 처지로는 어느것도 뜻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버지의 재산에 기대고, 황진사의 신분에 기대고, 일본제 소총에 기대고, 한때는 동학에도 기댔다가, 이번에는 일본의 문명에 기댄다. 아버지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저 아버지의 돈으로 과거를 보고 서울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양반인 황석으로부터 인정받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줄 일본제 소총에 집착하던 모습은 그런 백이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신념도 의지도 없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방아쇠를 당긴다. 사람이 총을 쓰는 것이 아닌 총에 사람이 지배당한다. 동학이 전쟁에서 승리한 듯하자 그것이 이번에는 동학으로 바뀌었고, 그마저 좌절되고 나서는 일본의 문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미 동학의 집강이 되었던 그때도 백이현은동학과 집강소라는 과도적인 체제가 가지는 한계와 모순을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김경천의 존재가 자신에게 가져올 위험을 깨달았어야 했다. 항상 머뭇거리고 외면하며 도망치다가 궁지에 몰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과연 백이현은 그때 그 많은 사람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것일까?
혼자서 무언가를 해 볼 용기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혼자만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도전할 의지같으 것도 없었을 것이다. 혼자서 열심히 주변을 설득하고 감복시켜 어느새 수만의 백성들을 이끄는 대장까지 되었던 전봉준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하긴 전봉준과 비교하는 것은 백이현에게 너무 가혹한 것일 수 있다. 하다못해 서형 백이강조차 거시기 시절의 악업을 오로지 자신의 진실된 행동만으로 모두 용서받고 있었다.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대장으로까지 추대되고 있었다. 그렇게 지옥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고통속에서 껍질을 벗으려는 용기와 의지가 없으는 백이현처럼 그저 쉽고 편한 길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속여가면서. 진실을 외면하면서. 오로지 이 길만이 자신에게 유일한 선택이다. 그렇게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고서 결국 진실을 마주하면 그제서야 속았다며 분노하는 것은 그런 순간조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에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계산이 빠른 것이다. 이쪽이 강하고 이쪽이 유리하다. 그러므로 이쪽에 붙는 쪽이 자신에게 위험도 적고 이익도 크다. 그것을 혹은 지혜나 혹은 이성으로 착각한다. 죽을 줄 알면서도 기관총 앞으로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은 그저 무모한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처럼 현명한 사람은 유불리를 알고 대세를 알아 그런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은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현실을 보라. 사실을 직시하라. 그래서 되겠는가. 그래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지만 진정 해야만 하는 일에는 유불리도 이해도 없다. 그래서 당위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양심이며 이성인 것이다. 그것이 용기다. 그래서 전봉준은 일본의 문명 뒤에 가려진 야만성을 보았고 백이현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전봉주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았으니까. 오로지 자신과 백성들의 힘만을 믿었다. 그래서 위로를 얻는다. 녹두꽃처럼 자신의 행동으로 깨어난 백이강 같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씨앗이 되어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그리고 후대에 널리 퍼뜨려 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에조차 어떤 두려움도 후회도 없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조차 전봉준과 동학의 지도자들을 당당하다. 대둔산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동학도들 역시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결국 그마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은 속았다. 철저히 속았다. 속아넘어가 준 것이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알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속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에마저 그 판단마저 전봉준에 미루려 한다.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사실을 외면하며 어떻게든 자신을 위한 변명들을 만들어낸다. 그런 비겁함이 윤시윤의 표정을 통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차라리 기분나쁘다. 하지만 현실이었으니까. 그런 약삭빠름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비겁함을 지혜라 영리함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지금도 현실에는 너무 많다. 피해보고 손해입을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싸우는 것을 포기했을 때 송봉길처럼 정작 지켜야 할 것도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고도 변명만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합리화하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대부분 탐욕에 자신을 맡기고 만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계속 살아남는다면 백이현의 미래는 아버지 백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탐관오리라고 매국노라고 처음부터 아무 이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황석주는 그동안 보여준 졸렬하고 추악했던 모습에도 마지막 만큼은 당당할 수 있었다. 마주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서부터 무너져가는 조선과 그런 조선을 만든 자신들과 같은 양반들의 한계와 모순을 직시한다.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반성하며 그 위에 새롭게 자신의 길을 찾는다. 양반으로서 동학과 함께하는 것부터 그동안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자신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 누구보다 진짜 양반이 되기 위해서. 그런 황석주에게 과거 백가와의 혼인을 받아들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음험한 모략을 꾸미던 당시의 비겁하고 비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반으로 죽을 수 있었다. 비록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원하던 모든 것을 이뤘다.
여전히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고 오히려 명주를 협박하는 백가와 거만한 모습으로 사또가 되어 부입하는 백이현의 모습이 겹친다. 죽음에도 당당한 전봉준과 백가의 협박에 두려움을 느끼는 명주와 그리고 그 와중에 다시 살아돌아온 백이강이 마주친다.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을 이런 식으로 드라마로 승화시킬 수 있구나. 사진에서 후손들이 느끼는 바로 그것을 송자인의 입을 통해 구체화시킨다. 지금도 수많은 녹두꽃들은 싸우고 있다. 동학은 아니더라도 사람이 하늘이 되는 세상을 위해서. 비극의 시대지만 그 와중에 한 번은 시원한 것이 있지 않겠는가.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다만 아무거라도 속시원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선택은 안타깝지만 그러나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다. 형 백이강은 전봉준에게 작별을 고하고 스스로 한 걸음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고 있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지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봉준을 호송하면서 감정이 지나치게 과잉된 느낌에 잠시 흥미를 잃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전봉준의 당당함은 너무나 선명히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봉준을 보내는 길이다. 백이강과 백이현 형제 모두, 그리고 송자인까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봉준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하필 일본과의 안좋은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가 남다르기도 하다. 과연 백이현이 군수로 내려간 고부에서는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모든 주인공들이 모였다. 비극의 시대에는 어떻게든 비극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백가의 기쁨이 마냥 희극이 될 수 없듯이. 마지막이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