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탐정 - 감정적이 되지 마라! 어머니의 눈물의 이유
그러니까 결국 노조가 있어도 전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혹시라도 정하랑이 현실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노조와 함께 파업이라도 했다면 대중의 여론은 어땠을까? 죽었으니 불쌍한 것이지 죽기 싫어 노조에 가입하고 사용자에 요구하고 결국 파업까지 했다면 오히려 욕먹는 것은 그나마 계약직 일자리도 없는 사람들 사정은 생각지 않고 호강에 겨워 요구만 해대는 정하랑이었을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 파업하면 중소기업 노동자를 생각하라. 중소기업 정규직 파업하면 비정규직을 생각하라. 비정규직이 파업하면 그마저도 없는 실업자들을 생각하라. 그러니까 호강에 겨운 소리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만족할 줄 알고 더이상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 정규직씩이나 되었는데 더이상 다른 요구를 한다는 것은 욕심이 많은 것이다. 주제를 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직으로 바꿔준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엄격함은 사용자를 상대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약자는 계속 약자일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를 객관화할 줄 모른다. 명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원인과 대상을 찾고 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도 의지도 노력도 부족하다. 하긴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절망도 좌절도 그들에게는 일상이다. 그래서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어차피 안 될 것이다. 어떻게해도 아무것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기보다 타협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어머니는 과연 아들을 생각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아들을 생각하는 자신에 도취되어 울고 있는 것일까? 시신을 훼손하기 싫어서 억울한 죽음의 원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으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결정인 것일까? 그냥 자기 탓을 하고, 운명이라 숙명이라 받아들이며, 더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지레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불쌍하고 죽은 아들도 이렇게 불쌍하다.
드라마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라면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욕쳐먹을 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아들이 죽은 원인인 영영 묻히고 어디선가 또다른 아들과 같은 피해자가 생길지 모르다. 하지만 자기와 상관없다. 나만 잘하며 된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 나만 착하게 성실하게 거스르지 않고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봐주기만을 바라면서. 그래서 힘들어 못다니겠다는 아들의 말에도 무조건 참고 다니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 정하랑 역시 차마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연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런 소시민의 비겁함과 나약함이 정작 세상의 악을 방관하고 용인하고 혹은 응원하고 만다. 약자인 비정규직을 죽음으로 내본 것은 분명 사용자들이지만 그 진실을 은폐하고 마는 것은 결국 누구였는가.
정말 화나는 말이다. 감정적이 되지 마라. 한 마디로 분노하지 마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딱 어머니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에 분노하기보다 죽은 아들과 자신을 먼저 불쌍히 여기고 그 안에서 원인을 찾고 타협하며 합리화하려 한다. 분노란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대상에 대해 가지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정상에서 벗어났다 여기는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당연한 동기다. 하지만 그런 분노란 감정은 나쁜 것이니까. 가져서는 안되는 감정이니까. 냉정한 이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주관적인 감정일 테니까. 따라서 객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하다. 그래서 분노하지 않는 회장이나 어머니와 정작 자기 일도 아닌데 분노하는 UDC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고 사회를 위해 더 기여하고 있는가.
너는 약자니까. 너는 힘이 없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니 포기하라. 그러니 타협하라. 그러니 침묵하며 물러서라. 부모에게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운다. 부모에게 거스르지 않고 선생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당연하게 학습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도 당연한 자신의 요구 역시 부정하며 불손한 것이다. 그래서 아들 정하랑 역시 동료와 손잡기를 거부했다. 그냥 부당한 것을 알아도 묵묵히 따르고자 했다. 그것이 바르게 잘 사는 길이다.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가.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가. 원래 이성이란 분노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르고 어긋남을 구분해서 그를 행동에 옮기고자 하는 동기고 의지다. 하지만 그런 건 오로지 강자의 몫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우고 당연하게 몸에 익힌다.
UDC의 활약 자체는 정작 너무 산만하고 체계가 없다. 과잉된 표정과 말투와 동작 속에 그러나 공기관다운 엄정한 질서나 체계가 느껴지지 않는다. 권위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자유로움 속에서도 나름의 엄정한 기강이나 체계 같은 것이 더 크고 더 강한 상대를 상대로도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주변의 이야기들은 통속적이고 UDC자신은 너무 두서가 없다. 덕분에 다른 이야기들만 하게 된다. 어째서 어머니는 그렇게 무력하게 몸을 숙여 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
동정이 아닌 분노여야 하고, 연민이 아닌 연대여야 한다. 서로 손잡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해야만 한다. 그래서 동지고 그래서 동료이며 그래서 우리다. 불쌍한 너와 그런 너를 동정하는 내가 아닌. 불쌍한 너와 그보다 더 불쌍한 내가 아닌. 하지만 끝내 무력한 눈물을 동정하며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저들은 강하고 우리들은 약할 수밖에 없다. 저들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서. 슬프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