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 지금 이 순간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10명은 있다
오래전부터 창작자들 사이에 떠돌던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 10명이 더 있다. 즉 지금 바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그러나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렇게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을 수 있을까. 혹시 누가 몰래 내 머릿속을 뒤져 훔쳐간 것은 아닐까. 그러다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농간일지 모르겠다.
문득 작가가 이 드라마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를 추리해 본 것이다. 아마 최소 몇 번은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좋다고 생각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미 벌써, 혹은 지금 당장 다른 사람이 작품으로 만들어 거의 비슷하게 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아주 조금만 내가 먼저 아이디어를 시도해 봤었더라면. 하긴 아무리 아이디어가 있어도 결국 구체화시켜 완성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습작도 완성시켜 본 사람들의 습작이 의미가 있지 완성도 못 시킨 사람의 습작은 그냥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쉽다. 한 편으로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드라마로 만든다.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인상에 남은 부분이었다. 가장 흥미로웠다. 나에게 작품에 대한 영감이 내린 순간 그와 똑같은 작품을 생각했던 사람이 있다. 아니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하나의 음악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사기꾼 악마새끼의 장난질이었다. 하긴 노래도 못하는 악마가 무슨 재주가 있어 세상에 없는 음악에 대한 영감을 계약자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법도 없다. 아이디어라는 것도 결국 원천이 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라는 것도 만들어진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완성된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기도 한다. 어쨌거나 원래 나의 것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김이경의 음악을 훔쳤듯 그녀의 꿈과 그녀의 삶까지 훔치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김이경은 꿈을 잃었고 지금껏 꿈의 주변을 맴돌며 살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자신이 세상을 외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자신을 사랑한 여자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과 자신으로부터 꿈을 얻고 그 꿈을 잃었던 한 소녀처럼.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처럼 무수한 상호작용을 통해 삶을, 그리고 자신을 만들어간다. 세상에 혼자 뿐이라 여겼었지만 그러나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왔는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성현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삼가도록 경고하고 가르치고 있었는가.
결국 악마와의 계약을 받아들인 것은 단 한 번 얼굴을 보았을 뿐인 아들을 위해서였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을 받아들이고 겸사겸사 지금의 젊음과 성공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또 한 소녀의 삶을 망쳐 버렸다. 그 소녀는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어쩌면 제물로 바쳐야 할 지 모르는 1급 영혼을 가진 소녀였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하립은, 아니 서동천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이 드라마에서 서동천이 70년대 말 간과 쓸개라는 듀엣으로 활동하며 만들었다는 노래들이 진짜 딱 그 시대의 스타일로 들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프로들일 테니 당시의 스타일에 대해 모르지 않을 테고 그 스타일을 적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데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무언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옛스러움이 어떤 낭만적인 달콤한 감상마저 불러일으킨다. 물론 아주 같지는 않다. 그래서 듣기에 더 좋은 것이다. 옛스러운 음악들은 진짜 옛스럽다. 오랜 음악들을 즐겨듣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음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많이 발전해 있다.
최근 이것저것 분주한 일들이 있어 몰아보는 것이 조금 늦었다. 재미없으면 그만두려 했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 지난주 방영분까지 조금 전 다 볼 수 있었다. 이마저도 몰아보는 것치고 상당히 늦은 속도다. 정경호의 발성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 나름대로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드라마일 것이다. 한 편으로 우습고 한 편으로 진중하다. 의미도 있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