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쇼 - 새삼 느끼는 출산률이 낮아지는 이유
출산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애들 낳아 기르는 일이 힘들어서다. 철이 없으면 철이 없어서 철들고 나면 또 철들어서 하여튼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부모 속을 썩이는 것이 자식이란 것들이다. 나는 아닐까. 그래서 자연상태의 동물들은 기회만 되면 새끼를 낳으려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부모의 보호로부터 멋대로 벗어나 있다가 죽는 새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영아사망률이 많이 낮아지면서 육아에 대한 부담 역시 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동네를 헤집고 놀아도 상관하지 않던 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나가서 놀다가 아예 해떨어져서 들어와도 걱정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혼자서 두 시간 세 시간 걸어 행정구역을 두 개 세 개 혼자서 넘어갔다 와도 그러려니 했었다. 벌거벗은 채 맨달로 포장도 안 된 골목을 하루종일 뛰며 멍투성이가 되어 돌아와도 건강하게 잘 놀고 있구나. 그에 비하면야.
보면서 역시 나는 애들을 좋아하지 않는단 사실을 - 아니 그냥 싫어한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하고 만다. 애들이 싫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애들도 역시 싫다. 말도 안 듣고, 모두 제멋대로에, 그런 주제에 오직 자기만 안다. 그나마 맏이인 다정이면 세상을 알고 현실을 알고 타협할 줄 알며 모두를 생각할 줄 안다. 도대체 아이들로 인한 사건사고만 그 짧은 시간동안 몇 번이 일어난 것인가. 아직도 끝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대중과 정치인의 관계와도 같다. 때로 대중은 어린아이와 같다. 말도 안듣고 이기적인데다 제멋대로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대중이란 이름 뒤에 숨어 그저 자기 주장만 하려 한다. 국민주권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마치 자기가 진짜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정치인을 상대로 갑질을 하려 한다. 고용관계가 아니다. 계약관계다. 주권은 유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에게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현실의 비대칭적인 구조로 인해 대중의 목소리가 정치인의 그것에 비해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무리하게 악을 쓰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점은 이해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뽑은 정치인의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럼에도 정치인이기에,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이이기에, 그런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다. 만일 대중이 생각하는 바가 자신과 다르다면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극중 토론프로그램 '논쟁'에서 주도적으로 낙태죄에 대한 토론을 하고자 하는 그것처럼. 토론이야 말로 정치인에게 처음이자 끝이다. 아니 토론이란 자체가 정치행위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해와 주장들을 조율해서 하나의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 모두에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최대한 합의할 수 있는 다수의 최선이어야 한다. 선의가 아니라 결과다.
과연 진심으로 자식을 사랑하지만 책임을 다하지 않는 생물학적 부모와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타인 가운데 누가 자신들에게 최고의 보호자일 것인가. 진심같은 건 오래전부터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런 건 남녀사이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엄격한 위계란 엄격한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책임이 곧 사랑이고 진심이다. 공적인 부분 역시. 위대한이 흥미로운 이유다. 과연 어떤 정치인이 될까. 기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