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 영혼이 사라진 통쾌함, 인간의 선과 악

까칠부 2019. 9. 12. 06:50

영혼을 잃은 이경의 모습이 오히려 더 통쾌하게만 여겨진다. 차라리 한 번은 겪어야 했을 과정인지 모른다. 사람 좋다고 너무 그 선의에 기대려고만 한다. 이해해 줄 것이다.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양보해 줄 것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영혼까지 자기 아들을 위해 내어달라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하긴 하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했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이경을 위한다고 아들을 살릴 수 있는데 말조차 할 수 없었다면 과연 후회가 없었을까?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서도 그래도 이경은 지켰다며 자신의 양심에 뿌듯해 할 수 있었을까? 그건 영혼의 유무와 상관없는 것이다. 아버지이기에 해야 하는 말이었고 아버지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경의 달라진 모습에 다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게 되는 것처럼.


후회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당시에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었다. 그러니 영혼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런 절박함이다. 그러면 이경의 절박함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엇을 그리 간절히 지키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최소한 가족은 아니었다. 역시 영혼이 있고 없고는 이경 역시 상관없었던 것이다. 가족에게는 그리 매몰찬데 방법은 달라졌지만 자신의 음악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더 분명해진다. 영혼이 사라진 하립이 더욱 극단적으로 자신의 자식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섰던 것처럼.


그래서 그것으로 좋은가. 하지만 그런다고 과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 이기적이어도 좋다. 다른 사람들에 상처를 입히는 것도 상관없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다. 가장 우선해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선의와 양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본능과 충동들 역시 마냥 무시할 수만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 또한 자신들인 것이다. 그리고 포기한 만큼 결국 상처가 되어 마음에 후회로 남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인가. 정의로운 일인가.


만일 진정 신이 있다면 그 신의 존재가 류라고 하는 악을 세상에 용인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때로 사람이 악해지지 않으면 이토록 추악한 현실에서 스스로 견뎌내기 힘들어진다. 때로 사람은 이경이 되어야 한다. 누구보다 이타적이고, 그러다가도 누구보다도 이기적이 된다. 그 답답함이 기특하다가도 그 거침없음이 통쾌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그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잃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이기도 이타도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선의도 양심도 욕망도 본능도 결국은 모두 자신을 이루는 부분들이다. 솔직해질 수 있다면. 당당해질 수 있다면. 정도를 벗어난 선의도 오히려 주위를 불편케 하고 곤란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중용의 진짜 뜻일지 모른다. 증류수는 오히려 사람의 몸을 해친다. 선의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