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 - 직장이 아닌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 그러나 불편했던 이유

까칠부 2019. 11. 15. 17:15

결국 직원들이 지켜낸 것은 직장이 아닌 자신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정이 안좋다고 정리해고라도 하려 하면 아예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려는 이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쫓기면 끝장이다. 여기서 내몰리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거리로 나앉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죽기살기로, 아예 회사가 망하든 내가 죽든 끝까지 가보자고 덤벼 볼 수밖에 없다.


아마 그래서 처음부터 그다지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겉돌듯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직장이 나의 전부다. 직장에서 나오면 나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회사가 잘 되게끔. 내가 조금 희생하고 양보하더라도 회사를 위해서. 하지만 정작 회사 망하고 거리로 나와보니 별 것 없었다. 그냥 좀 벌이가 줄고 여러가지로 불편한 일들이 생겼을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당장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든 나 혼자 먹고 사는 정도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굳이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려 저리 악착같이 굴어야 하는 것일까. 운과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그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다. 벌이가 줄어들고 불편한 일들이 생긴다. 어쩌면 직장이란 더 가혹하고 더 치열한 세상의 경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 해 온 익숙한 일상들이 있다. 앞으로도 지금의 일상들이 계속될 것이란 기대 또한 있다. 그래서 그런 일상 가운데 누구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늙어가다 퇴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직장이 사라지면 당장 거리에서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 새로운 일자리가 지금 일자리 같을 것이란 보장 역시 없다. 자신이 꿈꾸며 만들어가던 미래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 일을 그만두면 다음 일을 찾을 때까지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사직서를 내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박도준이나 하은우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구지나도 결국 잘난 체 하더니 회사를 나가고 갈 곳 없이 빈둥대며 방황할 뿐이었다. 있을 곳도, 당장 해야 할 일도 없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비참한가. 그래서 그 있을 곳을 찾기 위해, 혹은 만들기 위해 박도준도 하은우도 방향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박도준은 자신이 다니는 TM을 보다 올바르게 바꾸기 위해서, 하은우는 한심한 청일전자에서 벗어나 대기업인 TM으로 가기 위해서. 그러니 자기가 있을 직장을 지키는 일은 그들에게 너무 당연할 것이다. 회사가 전장이면 회사 밖은 지옥이다. 드라마 '미생'의 대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목숨 걸고 수 백 미터 높은 굴뚝에서 농성도 하고, 크레인에 올라가 몇 날을 단식도 할 수 있다. 화염병도 최루탄도 전과자라는 낙인까지 기꺼이 무릅쓴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 운도 좋게 회사에 실력있는 개발인력이 있었고, 더구나 TM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며 가장 큰 적이 알아서 사라져주고 있었다. 더불어 유튜브의 개인미디어에 대해 희망을 거는 이들이 이리 많은 것을 새삼 또 확인한다.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도 유튜브를 통해서 실력만 있으면 대기업과 경쟁해서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래봐야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해서 회사가 망해버리거나 했으면 직원들의 그 노력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코미디이기를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 바라게 되었던 이유였다. 역시 내 철학과 맞지 않는다. 회사가 내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결국은 어떻게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안정된 일상을 계속해서 지키며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회사가 망한다고 당장 내가 죽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계약직일지라도 계약이 끝난다고 당장 지금의 일상이 모두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출산률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졌다는데 가장 유력한 대안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 백수라 할지라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자신의 안정된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다. 저렇게 어떻게든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회사를 살리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삶이라면 언젠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경쟁하게 하라. 스스로 알아서 살게 하라. 그래서 불안해진다. 그래서 두려워진다. 그래서 더욱 움츠려들게 된다. 잘되었으니 다행이다. 그나마 마지막에는 그동안 보아 온 보람을 얻은 것 같기는 하다. 회사도 살아났고 더 잘되었다. 회사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일찍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어야 했다. 드라마니까 가능했다. 판타지도 너무 지나치면 불편해진다. 그 애매한 경계선이다.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