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의 죽음을 듣고, 삶이란 고통과 저주에 대해
새벽에 눈뜨자마자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최근 구하라의 이름으로 거의 검색해 보지 않았었다. 어차피 좋은 일로 기사나는 일도 거의 없고, 더구나 기사마다 달리는 악플이라는 게 상관없는 내가 보기에도 너무 심하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잘 지내겠거니. 아무밀 없이 지내고 있겠거니.
악플은 단지 악플일 뿐이다. 단지 인간이 쓰레기라 악플을 다는 것이다. 쓰레기같은 인성을 가진 낙오자 말종들이 악플이나 달면서 자위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악플에 과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혹은 악플을 인용해서 마치 대중의 여론이기라도 한 양 기정사실처럼 기사를 쓰고, 혹은 그런 악플을 더 많이 유도하기 위해 사실을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왜곡해가며 기사를 쓴다. 그런 행위들이 다시 악플러들이 뭐라도 되는 양 으쓱거리며 악플을 달도록 유도한다. 어떤 개새끼들일까?
새삼 악플러의 탓을 하는 언론이 더욱 혐오스러워지는 이유다. 누가 그런 악플러를 부추기고 이용해 왔었는가. 오히려 그런 악플러들과 부화뇌동하여 연예인을 물어뜯던 언론들이 악플러를 탓하며 정의를 부르짖는다. 악플러와 언론의 기사의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 언론의 기사만 제대로 나갔으면 과연 악플러들이 그렇게까지 극성일 수 있었을까. 아예 없는 것처럼. 있어도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철저히 무시하고 기사를 쓰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하긴 진짜 문제는 스스로 악플이 아니라 여기며 악플을 달아대는 정의로운 인간들일 것이다. 사실 이런 인간들의 너무나 선하고 정의로운 댓글들이 더 사람을 잔인하게 후벼파고는 한다. 너무 선해서. 너무 정의로워서. 혹시라도 자신의 망상에 불과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선하고 정의롭게 준엄한 꾸짖음을 내뱉는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도 존중도 없는 정의감이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살면서 깨닫는 것이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선량한 사람들보다 더 해악인 것은 없다. 정의로울수록 잔인하고 도덕적일수록 가혹하며 선량할수록 뒤가 없다. 세상에는 자신의 정의와 도덕과 선을 투사할 대상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 아이돌로서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실 연예인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리뷰 쓰면서도 연예인 이름을 자꾸 틀리고는 한다. 아이돌은 더욱 관심이 없었다. 카라라는 그룹이 있다는 것도 구하라를 알고 나서, 데뷔하고 2년이 지난 뒤에야 처음 알았다. 지금도 아이돌 그룹이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전혀 내 타입은 아니었는데 운명처럼 그냥 한 눈에 반하고 그리고 한동안 팬질을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팬이었었다. 그저 가끔 좋은 소식이 들리면 내 일처럼 좋아하고, 안좋은 소식이 있으면 그저 안타까워 하는. 그렇기에 더욱 최근 구하라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가 그리 꺼려졌을 것이다. 과연 그토로 자신을 부정당하는 느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과연 언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 당연히 죽는 것은 두렵다. 하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어지간히 독하지 않고서는 못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면. 더 두렵고 더 끔직하도록 절망적이라면 차라리 죽는 쪽이 더 편하고 쉬울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조차 찾을 수 없다면. 그럼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마저 찾아낼 수 없다면. 그것을 흔히 희망이라 부른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그래도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저주스러운 당장의 오늘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나아질 내일을 꿈꾸면서. 내일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데 과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가 사람을 그렇게까지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너무 지나치다. 관심은 좋은데 너무 관여하려 하고 있다. 그런 것을 언론이 가장 앞장서서 유도하고 또 이용하고 있다. 대중 역시 그에 편승하여 단지 유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설의 수단으로만 여긴다.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 연예인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상관없다. 연예인이 받는 보수 가운데는 자신이 그래도 좋은 권리에 대한 대가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런 것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연예인으로서의 의무다.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연예인도, 어떤 유명인도 결국 개인이고 인간이다. 인간의 존엄과 개인에 대한 존중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과연 있을 것인가.
죽음은 항상 슬픈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렇게밖에 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런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었다면. 살아서 내일을 맞는 것이 그토록 끔찍한 공포였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현실의 고통과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면. 행복하기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워낙에 무신론자라. 다만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것만으로도 조금은 나은 것 아닌가. 그렇게 삶이 고통이고 공포였다면. 절망이고 좌절이었다면.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사는 것이 차라리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고 공포스럽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살기보다 더 편하고 쉬워 보인다. 다른 누군가의 탓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선하고 너무 정의로워서 타인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모두로 인해. 인간을 죽이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항상. 자살은 타살인 것이다. 또 하나의 웃음이 우리 곁에서 멀어져간다. 갑작스럽지만 예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