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양준일 현상을 보면서, 낙천과 긍정의 진정한 힘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아마 김태원이 처음 예능에 출연했을 때도 이 비슷한 신드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 곳이나 불려나왔고 아무데서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지 소모가 심하다는 비판마저 있었다. 하지만 아주 꽤 오래 김태원은 방송에서 살아남았고 여전히 부활의 공연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나는 최근 신드롬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크게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양준일을 보면서 당시의 김태원을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당시와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첫째는 선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셋째는 그럼에도 그런 재능들이 비극으로 여겨질 만큼 고난을 겪어 왔다는 것, 마지막은 그런 고난들마저 올곧게 이겨낸 순수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두 사람 다 말하거나 행동할 때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 캐릭터가 매우 분명하다.
"내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겸손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아가는 것이다."
양준일이라는 인물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있을까. 내가 가장 인상깊게 들었고 그 어떤 말보다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아, 이 사람을 정말 강하구나.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구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구나. 무슨 말이냐면 자신은 그렇게 아내와 아들을, 자신의 가족들을 그동안 최선을 다해 지켜 왔었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고 확신이었다는 것이다. 얼마전 방송에서도 그런 말을 했었다. 다시 서빙하면 된다.
오래전 다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허황된 물음에 그냥 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겠다 대답한 적이 있었다. 여기 수많은 쓰잘데기없는 글들 가운데 어딘가 있을 것이다. 살아보니 돈 좀 못 벌어도 살 만은 하더라도. 조금 경제적으로 어렵고 현실이 곤궁해도 어떻게든 살아는지더라. 그러니까 괜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움츠러들 필요 없이 어떻게든 사람은 살게 되어 있으니 그냥 내 하고 싶은 것만 후회없이 하며 살겠다. 그래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식당에서 주방보조를 하든, 창고정리를 하든, 서빙을 하든, 그 전에는 영어강사를 했든 어떻게든 살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니 이제 다시 인기를 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삶이 편했을 리 없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시절이나, 미국으로 돌아가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시절 모두 내 기준으로도 그다지 여유로웠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미국에서의 삶은 월세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마 많은 순간 좌절했을 것이고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 준 것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그의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순간들이 모두 소중했고 그런 모든 시간들이 고맙기까지 했을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 음악을 했었던 만큼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지금 이 일들을 하고 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는 것 역시 자신이 아닌 팬들을 위해 하고 있다는 사명감마저 갖는다.
양준일이 말한 그대로다.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한 자신으로써 살아갔을 때 다시 자신의 의미는 돌아오게 된다. 가수로서의 양준일은 실패했지만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양준일은 성공했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그랬었다. 이제는 가수가 아닌 팬들의 양준일로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사람들은 더욱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화제가 된 그의 춤과 노래가 아니라 그의 순수하고 올곧은 성품이 묻어나는 한 마디 한 마디로 인해서다. 겸손하다고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다고 오만하지 않다.
무엇이 다시 올드보이들을 대중들 앞으로 불러내는가. 일시적으로 소모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오래도록 교감할 수 있도록 해 주는가. 어쩌면 한국사회는 어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저 저 높은 곳에서 꾸짖고 가르치는 어른이 아닌 조용히 앞을 보며 걷다가 잠시 뒤돌아 봐주는 그런 어른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능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선해야 하고 올곧아야 하는 것이다. 잠시 실패했어도. 잠시 좌절했어도. 그래서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라도. 그래도 괜찮다고 해주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 참고 걸어갈 만하다 하지 않는가. 굳이 지금의 길이 아니더라도.
특히 양준일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아버지가 부동산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가 망하기도 했었다. 음악을 동경해서 도전했다가 몇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한 뒤 여러 주변의 일들을 전전했었다. 지금까지 그가 해 온 일들은 그의 화려한 과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있다. 그들을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부끄럽지도 비참하지도 않다. 그런 여유와 품격이 느껴진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사람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누추함이 아닌 그런 모든 과정들을 극복하고 올라선 정복자와도 같은 우아함이다. 사실 그동안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주목을 받은 이가 적지 않았음에도 하나같이 단명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듣고 있는데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양준일은 그런 자신의 일상마저 긍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언젠가 웃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낙천과 긍정에 대해 떠든 적이 있을 것이다. 굳이 남을 비하하지 않고 상황을 비웃지 않더라도 기분좋게 -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아서 웃을 수 있는 진짜 웃음에 대한 것이었다. 몰라서 웃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러나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올라서서 굽어볼 수 있는 자신있는 웃음인 것이다. 가난도, 장애도, 현실의 불편함이나 어려움마저도 한참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그런 자신을 긍정하며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있으니까. 더 나아질 자신이. 무엇보다 꺾이거나 부서지지 않을 자신이.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자신을 지우거나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웃을 수 있다. 오히려 가난해서. 오히려 장애가 있어서. 현실이 불편하고 어렵고 괴롭기 때문에. 그래서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웃음을 짓게 만들어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러니까 괜찮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금도, 자신이 지금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이제 괜찮을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가끔 불확실한 내일이 두려워질 때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는 한다. 그러면 또 하루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보면 더욱 힘이 나게 된다.
제법 오래 갈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늦게 만났기에. 더 늦어서 만나게 되었기에. 그만큼 더 간절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선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순수가 진정 강한 것이란 사실을. 그런 삶을 살지 못했던 이들일수록 더욱. 살고자 하는 이들일수록 더더욱. 그래서 그는 스타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