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하이에나 - 욕망의 정글과 법이란 무기를 든 짐승들

까칠부 2020. 3. 16. 06:25

누구에게나 악한 부분이 있다. 악하기만 한 사람도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악하기만 한 강자도 선하기만 한 약자도 없다. 그것이 하이에나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물어뜯을 수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물어뜯을 약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 약점을 찾아 헤매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 인간의 약점을 찾아 헤매는 무리 가운데 정금자와 윤희제가 있다. 정금자는 이해가 된다. 정금자에게 법이란 처음부터 수단이었다. 정의도 진실도 질서도 아닌 단지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구할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법을 이용해서 어머니를 죽이고도 풀려났듯 그 법을 이용해서 자신을 폭행한 아버지를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법을 이용해서 더 많은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대대로 대법관을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윤희제는?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똑같이 악한 부분이 있듯 결국 법의 최정점을 경험한 윤희제와 법의 가장 밑바닥을 겪어 온 정금자 역시 같은 부류들이었다는 것이다. 출세하기 위해 법을 공부한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서 더 큰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법을 배운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째서 사법시험부활이 지금 와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가. 사법시험 자체가 약자가 한 번에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 있는 존재가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고 대법관들인 것이다. 그러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윤희제가 그동안 보아온 법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정글이란 것이다. 드라마 첫회에서 텅 빈 공간에 빌딩이 들어차는 CG는 아마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악과 악이, 탐욕과 탐욕이, 본능과 본능이, 분노와 증오와 원망과 적의와 같은 감정들이, 그래서 그 한가운데 법을 수단으로 삼는 변호사들이 있다. 그 변호사들의 세계 또한 정글이기는 마찬가지다. 그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에 기대며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현실이 그러니까. 과연 흙수저 정금자가 어디까지 이기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딛고 자신이 바라던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선도 정의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 저 욕망의 정글 속에서. 뭐라 말하기 그럴 정도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법이 원래 그렇다.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