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무도 모른다 - 어른이 된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버린 악의 순수함

까칠부 2020. 4. 1. 18:03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미 자신도 역시 그토록 비난하며 원망하던 어른이 되어 있건만 어른이 되지 못했기에 어른다운 행동을 보이지 못한다. 어쩌면 자신이 보고 자라며 어느새 닮아 버린 그들 역시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린 이들인지 모른다.


자신을 속였던 어른들처럼 다른 누군가를 속이고,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했던 어른들처럼 다시 누군가를 이용하고 배신하며, 자신을 다치게 했던 어른들처럼 역시 누군가를 다치게 만든다. 물론 그럼에도 핑계는 있다.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롯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질 수 있어야 하는 어른이 아닌 그저 누군가에게 미루고 핑계댈 수 있는 아직은 정신적인 아이들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세상은 이 모양인 것이 아닐까.


어쩌면 어른이란 자체가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자란다고 모두가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른이 드물기에 모든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기란 힘들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 되지 못한 나이만 먹고 몸만 자란 아이들이 세상을 제 마음대로 휘젓는다. 감당할 수 없는 부와 권력과 지위가, 그리고 명예가 아이의 손에 들린 흉기처럼 자신은 물론 온통 세상을 헤집고 상처입히고 만다. 과연 백상호 만일까?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백상호와 같은 인간은 현실에 얼마나 많은 것인가?


사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올바로 봐주고 올바로 들어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스스로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이 아무리 한심하고 모자라도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 제대로 바라봐주기만 한다면. 제대로 들어주기만 한다면. 봐주기를 바라며 올곧던 줄기가 비틀리고, 채 말하지 못한 속엣 생각들은 상처를 비집고 독으로 자라난다. 어른은 아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듯 아이들 역시 어른이란 거울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게 된다. 온전히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차영진의 존재가 그런 점에서 고은호에게는 얼마나 큰 구원이었는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말없이 지켜봐 줄 수 있는 황인범의 존재가 주동명에게도 든든한 의지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대단한 인간은 못되었어도 죽은 최대훈 역시 하민성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 줄 단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얼른 자라 어른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을 이용하고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며 그를 소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일 것인데도. 아마 성흔살인사건의 동기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살인이, 그와 관련한 누군가의 한 마디가,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지금의 형사 차영진을 있게 만들었다.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차영진이 고은호를 지키기 위해 고은호가 지키고자 했던 진실을 찾으려 나선다. 마침내 고은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었다.


백상호나 그를 따르는 배선아 고희동 오두석들이나 너무 아이같은 모습이 그래서 섬뜩하도록 서글프다. 살인마저도 서슴지 않는 그들이 그러나 백상호 앞에서 몸을 돌린 채 벌을 서고 있다. 자신의 책임을 벗기 위해 느닷없이 옆에 있는 오두석에게 비난을 퍼붓는 고희동의 모습은 또 얼마나 천진하기만 한가.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를 위해 진심어린 기도까지 할 정도로 그들은 한 편으로 순수하기까지 하다. 순수한 악이란 것일까?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순진한 탐욕과 이기가 그럴 수 있는 힘을 만나 악으로 자라난다.


들어주기를 바랐다. 아마 백상호도 간병인 김태형의 말을 온전히 다 들어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에는 백상호 자신조차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채임을 무의식중에 깨닫고 있었거나. 차영진이라면. 고은호가 저토록 의지하는 차영진이라면. 고은호를 진심으로 친구라 여길 수 있는 차영진이었다면. 그러나 거부했고 김태형은 남겨졌다. 하긴 정작 들어야 하는 것은 백상호도 차영진도 아니었을 것이다. 역시 아직 미숙했기에 온전히 그의 말을 듣디 못했던 이선우에게 남겨진 숙제인 것이다. 이제라도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 그는 그때 듣지 못한 이야기를 다시 들어야만 한다.


죽은 최수정의 이야기는 차영진에게도 역시 온전한 어른이 되기 위해 딛고 일어서야 하는 과거의 족쇄인 것이다. 차영진이 차영으로서 스스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금껏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죽은 최수정의 친구이며 살인사건의 관계자다. 그녀 스스로 벗어나기 전까지. 그래서 황인범이 있는 것일 게다. 주동명과 하민성에게 그런 것처럼 황인범은 지금껏 차영진을 가까이서 지켜봐 오고 있다.


진실에 다가간다. 진실을 쫓아 거짓의 턱밑까지 다가와 있다. 백상호에는 그런 현재가 마치 게임처럼 즐겁기만 하다. 아니 과연 백상호에게 현실이란 존재할까. 현재란 존재하고 있을까. 마침내 찾아낸 진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보다 진실의 앞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흥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