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법이라는 수단과 구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정금자의 이유

까칠부 2020. 4. 12. 06:57

홉스는 태초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정의했었다. 인간이란 결국 욕망하는 존재란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이기다. 그래서 타인을 해하고, 타인을 갈취하고, 그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 공동체를 이루러면 모든 인간이 이기와 욕망만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바로 법이 존재하는 이유다. 개인과 개인의 욕망과 이기를 중개하고 차단하는 매개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 법에도 또다른 개인의 욕망과 이기가 끼어들게 된다.

 

검사가 고발자고 판사가 심판자라면 변호사는 그 사이에서 의뢰인인 개인의 이기를, 욕망을 변호하며 지키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변호사 자신의 이익을 위한 욕망과 이기라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더 많은 수임료를 받기 위해.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서.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 그 정점에 송필중이 있고, 그 한참 아래에 의뢰인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변호사 정금자가 있다. 정금자의 욕망은 단순하다. 자신을 괴롭히던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스스로 헤어나기 위해서 돈이라는 힘을 손에 넣어야 한다. 돈을 벌기에 가장 좋은 직업이 변호사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사법시험을 봤고 어렵게 변호사가 되었으며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가는 중이다. 

 

너무 선명하고 순수해서 뭐라 한 마디 덧붙이는 것조차 민망해질 지경이다. 돈을 벌어야 강해지고 돈을 벌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래서 정금자는 힘있는 자의 편에서 그들을 위한 변론을 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그것은 법으로부터, 혹은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뢰인을 지켜야 한다는 변호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경우에 대한 것이다. 송필중과 정금자가 결정적으로 부딪히는 부분이다. 죽어가는 서정화를 살렸다면 자신의 의뢰인인 손봉우 회장이 살인자가 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었다. 이슘 역시 자신의 중요한 고객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을 믿고 하찬호는 자신의 법무법인에 변호를 맡겼었다. 무엇보다 서정화를 죽이고 정금자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법을 이용하되 지켜야 하는 변호사로서의 기본을 부정한 행위다. 용서할 수 없다.

 

결코 선해 보이지 않는 강자들을 위해 변론을 하면서도 정금자가 송필중과 맞서며 정의의 편인 양 행세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정금자는 스스로 정의의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송필중을 응징하고 심판하여 나락으로 떨어뜨리면서도 그것을 결코 정의의 구현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의뢰인을 위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슘과 손봉우라는 유력한 인물을 고객으로 유치하는 것은 그녀가 변호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송필중을 딛고 넘어서야 했고 송필중이란 장애물을 치워야만 했었다. 의뢰인과 자신을 위한 이기와 욕망이 그런 개인들을 위협하는 송필중의 악을 응징하고 심판한다. 그러면 과연 정금자와 윤희제가 송필중만한 힘을 가지게 된다면 또다른 송필중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물론 필요없다. 모든 이야기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말로 끝맺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모든 이혼한 부부는 사랑해서 결혼했을 것이다. 모든 추락한 권력자들은 정점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누렸을 것이다. 타락하기 전까지 모두는 선하고 정의로운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정금자와 윤희제는 변호사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그 신념 아래 승리와 성공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사무실에 좋은 사람들도 모여 있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내일에 대한 기대 역시 희망차기만 하다. 아버지가 죽었다. 오래도록 자신을 괴롭혀 온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고 대신 죽임을 당했다. 구원이었을까. 속죄였을까. 아니면 새로운 짐이었을까.

 

양심이라 부르기에는 개인의 욕망들이 너무 선명하고, 욕망이라 말하기에는 서로를 향한 선의가 너무 따뜻하다. 법이 어떻게 미약한 개인에게 구원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 법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나는 성공의 이야기인 것이다. 법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법을 이용해서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정금자라는 인물이고 드라마를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정금자는 누구의 앞에서도 오만할 정도로 당당해질 수 있다. 하이에나도 맹수다. 사냥꾼이다.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