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 평범하고 평범해서 특별해지는 병원의 일상
내가 그동안 몇몇 드라마를 비판하며 한결같이 주장왔던 것들이다. 일상의 일상화. 일상의 비일상화. 비일상의 일상화. 결국은 시청자가 납득하며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여야 하는 것이다. 배경이 되었든, 에피소드가 되었든, 캐릭터가 되었든. 그래야지만 드라마는 내 이야기가 되고, 내가 몰입하고 감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병원이란 대부분 드라마에서 매우 특별한 공간으로 설정된다.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매우 비상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니면 이제는 식상한 정치놀음으로 날을 지새거나.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또한 개인으로서 병원 안에서 평범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듣기만 해도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평범한 이야기들이 평범해서 오히려 더 특별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하나같이 평범한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40대 전에 교수 타이틀을 달고 있다는 자체부터 매우 특별한 것이다. 동기 5명이 모두 실력을 인정받으며 교수 소리를 듣고 여전히 친구로서 함께 어울려 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여백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에피소드들인 것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리고, 어쩌다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뭐냐 싶게 자기 일처럼 공감해 버리게 되는. 자신이나 혹은 주위의 누군가에게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디테일하다기보다 그저 무심하게 툭 던져지는 듯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나머지 이야기까지 모두 평범한 일상처럼 채색해 버린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환자들과 그 환자들을 치료하며 맞닥뜨리는 평범하지 않은 일상들이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을 통해 병원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상들이 되어 버린다. 하긴 의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 직업들이 남들은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특별함을 갖는다. 그런 자기만의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또 직업이고 전문성이라 불리는 것이기도 하다. 무역회사에서 일어나는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그저 샐러리맨들의 평범한 일상처럼 여겨지듯 병원이란 단지 의사이고 간호사인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병원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상들이 신선하면서도 곧 자신의 이야기인 양 친근하게 공감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런 가운데 자신과 오랜 기억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이란 곧 자신의 정체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전제하는 정의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지금 어째서 이런 말과 행동들을 보이는가 그들은 그래서 이해한다. 원래의 자신과 세월이 바꿔놓은 자신에 대해서 오히려 자신보다 더 잘 자신을 이해해 준다. 역시 병원의 특별한 이야기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리는 매우 중요한 트리거일 것이다. 다섯 친구들이 공유하는 시간과 기억들이 병원이란 공간과 맞물리며 그저 일상적인 시간과 기억으로 되돌리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친구들과,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때로 좋지 못한 사람들과도 함께하는 평범한 병원이란 공간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만큼 드라마답게 과잉된 설정은 있어도 그마저 자연스럽게 납득시키는 탁월한 연기와 연출이 있다. 어차피 모든 개인은 특별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특별함을 갖는다. 그런 특별한 이야기들이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그런데 튀지 않는다. 모난 것까지 모두 자연스럽게 채워 다듬는 정교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여유까지 있어 넉넉하다. 야무지게 빈 틈 없이 꾹꾹 눌러 채워진 이야기가 그러나 살아있는 듯 그 넉넉한 틈으로 숨을 쉬고는 한다. 배우들의 연기야 당연히 훌륭하고, 대본과 연출 역시 무리없이 탁월하다. 쉽지 않다. 이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그동안 다른 드라마들을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냥 평범한 것을 넘어 당연하게 병원이란 공간에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있는 듯하다. 바로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마치 맞장구치고 있는 것처럼. 때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야기에 환호를 지르고, 때로 너무 밉고 싫은 누군가에 함께 불평을 내뱉고, 때로 편안한 휴식처럼 밴드의 연주를 함께 듣는다. 그런 친근한 웃음들이 좋다. 친구같은 이웃같은 평범한 말투와 표정들에 빠져든다. 그렇게 병원은 병원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음악들도 좋다. 아는 체 하면 괜히 나이 티낸다고 할까봐 애써 모른다 퉁치고는 한다. 가끔은 한참 기억을 긁고서야 떠오르는 노래들도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이후 신원호와 이우정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방향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새 나이를 먹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긍정하게 만든다. 마치 오랜 기억과 시간을 함께 해 온 친구처럼. 때로 얄밉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