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 억눌러 온 진심을 드러내야 할 때, 어른의 사랑을 위해
이익준이 김준완과 동생 익순의 관계를 눈치챘다. 학회준비를 위해 공부하겠다고 병원으로 돌아간 사람이 정작 사무실에서는 프리셀이나 하고 있었다. 공부하러 병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뻔하게 티를 내면서도 아닌 척 힘들게 연기를 하는 친구와 동생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마 이익준이 전처와 이혼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아주 많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것은 살을 맞대고 감정을 공유하며 살아야 하는 배우자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게 무슨 문제냐 싶다가도 쌓이고 쌓이는 사이 원망이 되고 미움이 되고 끝내는 함께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혼하고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된 감정은 아닌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애틋할 수 없다.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감춰 오고 있었다. 마치 본능처럼 별 것 아닌 농담처럼 흘리는 것조차 악착같이 거부하고 있었다. 차라리 술은 할 잔 마시고, 차라리 평소 않던 억압적인 태도도 취해보고, 그러고서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감춰왔던 원래의 얼굴이 드러난다. 봇물터지듯 그동안의 시간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과연 채송화는 그런 이익준의 마음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한 시간에 비례해서 사랑도 이루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 혼자서 몰래 좋아했던 시간 만큼 상대도 자신의 마음에 응해주었으면. 안치홍의 시간도 그리 짧지만은 않다. 무려 인턴 첫출근 때부터 가져왔던 감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는 이익준의 한 마디가 가지는 무게를 안치홍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겁게 감춰 왔기에 그 한 마디는 한숨처럼 깊고 허무하기만 하다. 잃을 수 없기에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더욱 숨겨야만 했던 그 절실한 감정들이 안치홍을 울린다. 정확히 이익준도 채송화도 아닌 그를 통해 떠올린 자신의 감정들이 그를 울린다.
참 지킬 것도 많고, 그래서 따지고 헤아릴 것도 많은 복잡한 어른들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좋아 죽는 것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생각하고,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상대의 사정까지 헤아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함으로써 잃어야 하는 것들과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감정을 포기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때로 착각에 빠진다. 신부가 되고 싶은 자신의 오랜 꿈과 장겨울과 함께 있으면 즐거운 시간 가운데 과연 무엇이 진짜인가. 그러나 신부가 되고 싶어 간절히 바라왔던 시간들이 너무 오래고 너무 길었던 것이다. 춘향전은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없다. 어찌보면 참 답답하고 뜨뜻미지근한데 그만큼 자신들은 절박하고 필사적이다.
오랜 우정에 이은 오랜 사랑들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던 만큼 더 사랑에 조심스럽고 사랑에 목말라 하는 어른들의 사정이다. 환자를 고치고 싶고, 환자를 살리고 싶고, 환자를 지키고 싶은 의사들의 본능처럼. 그래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답답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 격렬한 감정들을 잘 녹여낸다.
일부러 몇 번이나 돌려가며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피며 보는 중이다. 눈동자가 움직이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무심코 돌아가는 고개짓까지. 미묘한 감정의 선이 마치 진짜 자기의 이야기인 양 배우들의 표정 위로 떠올라 흐르며 차오른다.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사람의 일이란 항상 그렇게 복잡하기만 하다. 단순한데도 복잡하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