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조영남 무죄확정, 예술의 창작과 기술의 경계에 대해

까칠부 2020. 6. 26. 05:59

몇 년 전이던가 임재범이 '고해'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말했다가 크게 곤경을 당한 적이 있었다. 실제 악보로 다듬어낸 것은 다른 작곡가인데 어째서 임재범 자신이 '고해'를 만들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윤종신도 지금까지 자기가 만든 곡은 단 하나도 없는 셈이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는 윤종신이 직접 자기 곡의 악보까지 써낸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하림과 조정치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렇다면 윤종신 작곡의 노래들은 원래 하림과 조정치의 작곡이었던 것일까?

 

실용음악과 나와서 해외유학도 다녀오고 수많은 실무를 겪었어도 결국 멜로디 하나 떠올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악기도 다룰 줄 모르는데, 그냥 콧노래만으로도 멜로디를 만들어 들려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뛰어난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술의 세계다. 의외로 세계의 수많은 뛰어난 아티스트들 가운데도 찾아보면 악보를 전혀 볼 줄 모르고 당연히 그릴 줄도 모르는 경우를 헤아릴 수 없이 보게 된다. 그런데도 역사에 남을 훌륭한 명곡을 잘도 만들어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조력자들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도움을 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명곡들의 작곡자로 이름을 남기는 것은 핵심이 되는 멜로디를 만들어낸 바로 그 사람 뿐인 것이다. 나머지는 단지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것이 현대예술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에야 예술의 기술조차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드는 자체가 소수의 기술을 독점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였었다. 음악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 자체로 예술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근대까지 예술가 가운데 진짜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 출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집안에 돈이 있어야 다른 예술가 아래 도제로 들어가고 기술을 배워서 예술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무엇보다 악기 없이도 대충 콧노래나 부르고 기타줄만 튕길 줄 알아도 그래도 기록해주는 녹음기란 것이 발명된지 한 세기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야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유튜브만으로도 얼마든지 배워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유튜브도 필요없이 의무교육 과정에서 교과서에 나온 내용만 충실히 따라해도 어느 정도 기술적으로 그리는 정도는 가능해진다. 음악 역시 세상에 널리고 발에 채이는 것이 실용음악과라는 것이다. 굳이 실용음악과 나오지 않아도 프리로 풀린 프로그램만 제대로 쓸 줄 알아도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를 구체화시키는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컴퓨터가 악보도 대신 그려준다. 편곡도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들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킨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유한 창작의 작업이란 임재범이나 윤종신과 같이 주제가 될 만한 프레이즈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것을 음악의 이론과 기법에 맞게 악보로 완성해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면 예술에 있어 진짜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해답도 나오는 것이다. 기술인가? 주제인가? 그러면 조영남의 미술에서 주제는 누가 만들었는가?

 

의외로 음악과 대비해 이해하니 더 이해가 쉬워진다.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봐 온 때문이다. 아티스트는 단지 주제만 만들고, 기술적인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물론 그럼에도 대중들은 기술적으로 완성한 이에게 가치를 두며 주제를 제공한 아티스트의 역할을 비웃고 폄훼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재범이 욕먹었던 것이다. 주제가 되는 멜로디도 가사도 모두 임재범 자신이 만들었는데 기술적으로 악보로 완성한 이가 다른 사람이기에 작곡가는 다른 사람이다. 그런 것이 실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영남의 미술은 누구를 작가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기술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어째서 대학까지 나온 그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인가. 남들과 달라야 한다. 독창적이고 고유해야 한다. 작가만의 아이덴티티다. 이것은 그 사람의 작품이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은 그 사람만의 작풍이다. 그래서 조영남은 자신의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아치울 수 있었고, 대신 그림의 일부를 그려준 사람은 얼마간의 대가나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직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모호한 한국 사회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사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화투를 소재로 한 조영남의 그림에 대해 나 개인은 그다지 아무런 의미도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조영남이 아니었어도 그 그림들이 그렇게 비싼 값에 팔렸을 것인가. 하지만 예술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조영남의 아이디어보다 조영남이라는 유명인이 그렸다는 사실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예술이라는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 그런 인식까지도 모두 고려해야만 하는 것인가. 판결을 두고 떠오르는 생각이다. 조영남이 아니었으면 과연 문제라도 되었을까. 그런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