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 잔혹해서 슬픈 모순의 동화, 그들의 이면
까칠부
2020. 6. 28. 07:56
원래 사람이란 잔혹한 만큼 슬프고 악독한 만큼 아픈 법이다. 상처가 그 사람을 만들다. 베이고 찢기고 후벼파여진 상처들이, 그로 인해 얻었고 잃었던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이다. 고문영의 견해에 동의한다. 어차피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을 아름다운 동화로 꾸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더 적나라한 모순이고 부조리다. 그것을 사람들은 판타지라 부르는 것이다.
흥부전의 교훈은 착하게만 살다가는 어차피 있지도 않을 행운이 아니면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뜻이고, 인어공주 역시 현실을 무시한 무모한 열정이란 영혼이라는 자기만족으로 끝나고 만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지 않았다면 흥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잘 살았을까? 자식들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 공기의 정령이 되어 영혼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없었다면 인어공주의 사랑은 무엇을 남겼을까? 언니들까지 탐스러운 머리를 마녀에게 잘라 바쳐야 했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참고 착하게 살고, 무섭고 힘들더라도 한 번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라. 그조차도 없다면 사람은 살지 못한다.
위악은 때로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차라리 선에 대한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기에,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바람도 믿음도 없을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위악으로 그 모든 것들을 자기가 먼저 외면하고 버리려 한다. 나는 원래부터 착하지 않고, 성실하지도 정직하지도 않고,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인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 대신 동화에서와 같은 멋진 보상 같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기에게는 자격이 없고 현실에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절히 소망해서, 그래서 악착같이 인내하며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가지고 싶으면 그냥 훔쳐서라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문영에게도 어떻게든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위선이란 또한 그마저도 놓아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리는 절박함이기도 하다. 절벽에 매달려 겨우 붙잡은 한 포기 잡초처럼 그마저 놓아 버리면 이제까지 버티며 지켜온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자신을 지탱하던 현실도, 그런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신마저 모두 사라져 버릴 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희망을 부여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희망을 부여잡고 사는 자신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절박한 처지에 대한 발악인 것이다. 그래서 고문영은 문상태를 탐내는 것이다. 문상태는 고문영 앞에서만 솔직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 앞에서라면. 서로에게서 자신이 갖지 못한, 혹은 자신이 놓아 버린 것들을 찾게 된다.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필사적으로 위선적이고 위악적인 것일까?
사랑이라기보다는 갈망이다. 이끌림이라기보다는 갈구다. 무엇이 이 사람을 단단히 버티며 지탱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이 사람을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그래서 서로를 통해 자신을 단단히 지탱해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서로에 의해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의식하고, 단단해져서는 안되는 자신을 인식한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리고 마는 것일까. 운명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발견한다. 공생이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그들은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찾게 된다. 결여되고 비어 있는 만큼, 그래서 간절히 갈구하는 만큼.
영상이 참 감각적이다. 모든 장면이 직관적으로 바로 다가오는데, 장면의 연결마저 영상적 연출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때로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것만으로도 드라마의 내러티브와는 별개의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도 흥미롭고, 캐릭터는 더 매력적이고, 영상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적절한 긴장과 이완이 드라마를 보는 순간을 잊게 만든다. 서예지는 매력적이다. 김수현은 잘생긴 만큼 확실한 존재감과 연기력을 보여준다. 연출도 대본도 탁월하다. 간만에 집중해 보는 드라마다. 이런 때도 있어야 TV보는 보람도 있는 것이다. 재미있다.
흥부전의 교훈은 착하게만 살다가는 어차피 있지도 않을 행운이 아니면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뜻이고, 인어공주 역시 현실을 무시한 무모한 열정이란 영혼이라는 자기만족으로 끝나고 만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지 않았다면 흥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잘 살았을까? 자식들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 공기의 정령이 되어 영혼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없었다면 인어공주의 사랑은 무엇을 남겼을까? 언니들까지 탐스러운 머리를 마녀에게 잘라 바쳐야 했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참고 착하게 살고, 무섭고 힘들더라도 한 번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라. 그조차도 없다면 사람은 살지 못한다.
위악은 때로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차라리 선에 대한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기에,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바람도 믿음도 없을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위악으로 그 모든 것들을 자기가 먼저 외면하고 버리려 한다. 나는 원래부터 착하지 않고, 성실하지도 정직하지도 않고,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인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 대신 동화에서와 같은 멋진 보상 같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기에게는 자격이 없고 현실에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절히 소망해서, 그래서 악착같이 인내하며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가지고 싶으면 그냥 훔쳐서라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문영에게도 어떻게든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위선이란 또한 그마저도 놓아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리는 절박함이기도 하다. 절벽에 매달려 겨우 붙잡은 한 포기 잡초처럼 그마저 놓아 버리면 이제까지 버티며 지켜온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자신을 지탱하던 현실도, 그런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신마저 모두 사라져 버릴 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희망을 부여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희망을 부여잡고 사는 자신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절박한 처지에 대한 발악인 것이다. 그래서 고문영은 문상태를 탐내는 것이다. 문상태는 고문영 앞에서만 솔직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 앞에서라면. 서로에게서 자신이 갖지 못한, 혹은 자신이 놓아 버린 것들을 찾게 된다.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필사적으로 위선적이고 위악적인 것일까?
사랑이라기보다는 갈망이다. 이끌림이라기보다는 갈구다. 무엇이 이 사람을 단단히 버티며 지탱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이 사람을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그래서 서로를 통해 자신을 단단히 지탱해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서로에 의해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의식하고, 단단해져서는 안되는 자신을 인식한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리고 마는 것일까. 운명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발견한다. 공생이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그들은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찾게 된다. 결여되고 비어 있는 만큼, 그래서 간절히 갈구하는 만큼.
영상이 참 감각적이다. 모든 장면이 직관적으로 바로 다가오는데, 장면의 연결마저 영상적 연출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때로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것만으로도 드라마의 내러티브와는 별개의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도 흥미롭고, 캐릭터는 더 매력적이고, 영상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적절한 긴장과 이완이 드라마를 보는 순간을 잊게 만든다. 서예지는 매력적이다. 김수현은 잘생긴 만큼 확실한 존재감과 연기력을 보여준다. 연출도 대본도 탁월하다. 간만에 집중해 보는 드라마다. 이런 때도 있어야 TV보는 보람도 있는 것이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