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 인간이 괴물인 이유
인간이 가장 잔인해지는 것은 언제일까? 자신의 선의에 대해 확신을 가졌을 때다. 자신의 행동이 절대로 옳다고 조금의 의심조차 없이 믿게 되었을 때인 것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 수 십만 이상의 목숨이 아무 죄책감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드레스덴을 불바다로 만들고 도쿄를 깡그리 불태우면서도 오히려 폭격지 조종사들은 정의로울 수 있었다. 언제 사람은 괴물이 되는가? 정의로울 때다. 한 점 그늘도 없이 오로지 올곧고 바를 때다.
태연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란 이유로 죄를 덮고 새로운 죄를 저지른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얽혀 있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타인을 죄인으로 만든다. 그 앞이 참혹한 지옥임을 알면서도. 동생이기에 봐주고 아들이기에 편들어주고 친한 사이이기에 사정을 살펴준다. 그렇게 얼기설기 얽힌 인정이 진실을 가리고 죄악을 감춘다. 실제 현실에서 흔하게 보게 되는 모습들인 것이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피해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범죄자의 편을 들어 무고한 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만다. 이동식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 동네에 비밀은 없다. 단지 알면서도 서로 감춰 줄 뿐이다.
이동식 뿐일까? 뻔히 누가 범인이 알면서도 여러 사정을 앞세워 죄를 감추고 진실을 묻으려는 이들이 이동식 한 사람 뿐일 것인가. 아니 목적이 다르다. 이동식이 바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얼기설기 얽힌 인정을 헤집고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이제까지의 친분따위 아랑곳없이, 지금까지의 인연 따위 전혀 상관하는 일 없이, 그래서 남의 사정따위 돌아볼 필요 없이 오로지 진실만을 드러낸다. 단순히 법을 어기고 말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가족과 친구와 자신을 이루는 주변의 모든 세상들을 저버려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려야 할 지 모른다. 그렇게까지 과연 자신들은 경찰로서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하필 아들이기 때문에. 하필 동생이기 때문에. 하필 동료이고 동네에서 형아우하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진묵이 범인이었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주변과의 인정에 매달려 존재하던 주변인이었기에 그의 범죄는 더욱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단 하나 뿐인 딸이었고, 은인이었고, 혹은 자신을 알아주던 친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관계란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질 것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고, 딸은 어머니를 의심한다. 손가락만 남기고 실종된 이의 삶에 대해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성급함은 주위라고 예외가 아니다. 내 딸은 그럴 리 없다. 어찌 그리 쉽게 단정하는 것일까.
누가 괴물인가? 무엇이 괴물인가? 기자는 확실히 jtbc라는 방송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레기가 괜히 기레기가 아니다. 그런 기레기를 필요로 하는 대중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 것인가? 단순히 범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존재론적인 의미다. 기독교의 원죄론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인간은 어째서 죄를 짓는가? 무지하고 나태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인간이 악이 아니기를. 슬프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