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무쿠로 - 전혀 긴장감없는 거대로봇 거대서사
일단 적인 에피돌그가 너무 허접해서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가우스만으로도 에피돌그의 양산형인 헤드리스를 상대로 거의 무쌍을 찍을 수 있었다. 헤드리스를 상대로 무쌍을 찍는 걸 넘어서 간부용 커스텀 메카닉을 상대로도 제법 선전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마지막에 등장한 대장기 오거가 그래도 대장기다운 위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한 방에 침묵이다. 이런 놈들이 우주를 넘어서 지구를 정복하러 온다고?
무려 450년이다. 4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구의 문명은 에피도르그의 선견대를 어느 정도 맞설 수 있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에피도르그의 기술수준이란 450년 전 기체인 쿠로무쿠로, 자기들 말로 검은 그란돌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군사기술도 한심해서 변경관리관이나 교정관이나 제대로 된 군사지식 없이 전술도 작전도 조직도 체계도 없이 그야말로 오합지졸인 채로 각개격파당하고 있었다. 역대 침략자 가운데 이보다 허접한 놈들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450년 동안 침략방법 역시 바뀐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액션은 훌륭하다. 메카닉이 훌륭해 보이는 것은 액션의 연출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액션의 분량을 늘리기보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 이게 맞다. 대개 싸움이란 한순간에 결정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순간을 위해 서로 대치하는 기간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이 치명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잠시의 방심이나 오판으로도 결과가 결정되고 만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연출도 어떻게 공방이 이루어지는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숨가쁘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프레임을 생략하는 꼼수가 아닌 진짜 빠른 액션으로 그 내용을 꾹꾹 눌러 채워 넣는다.
실사를 기반으로 리터치한 사실적인 아름다운 배경과 미려한 캐릭터 작화에 액션연출이 모든 걸 다 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정작 지구를 지배하겠다고 침략한 적이 너무 허무하게, 어이없을 정도로 무능하게 묘사되는 점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정작 승리하고도 통쾌함을 느끼기 힘든 아쉬운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무에타를 제외하고 과연 에피돌그의 변병관리관 가운데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누가 있긴 했는가.
일상에서의 캐릭터가 오히려 작품의 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울 정도였다. 작품의 내러티브보다는 각 캐릭터의 일상적인 행동들이 더 매력적일 정도였다. 그래도 끝까지 본 것은 장점이 단점을 가릴 만큼 컸기 때문이다. 액션은 진짜였다. 단, 액션만 진짜였다. 그냥 러브코미디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작품인 것 같다. 다만 거대로봇물로써 적절한 거대서사를 보여주었는가는 의문점이 있다. 중간에 포기하려다 2화를 남겼다. 많이 아쉬운 작품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