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돌파 그렌라간 - 어색한 작위와 불편한 가치관, 다름을 인식하며
제목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 왔었다. 특히 역대 로봇메카들의 크기를 비교하는 유튜브 동영상에서 역대 가장 거대한 로봇으로 주역로봇인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언급하는 것을 보며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거대로봇물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많아 줄어들어 있던 터라. 무엇보다 일부러 찾아서 다운로드받아 보는 자체가 번거로웠었다. 덕분에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애니메이션을 새롭게 찾아 본 것이 몇 없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한 달 사용료만 내면 등록된 작품을 거의 무제한으로 볼 수 있다.
하필 추천동영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봐야 할까? 일단 거대로봇물이라는 점에서 걸리고, 시작부분에 작화스타일이 내 취향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70년대의 그것과 다른 매우 인위적인 과장된 열혈이 지금의 내게는 무척이나 부대끼는 느낌이었었다. 볼까? 말까? 그렇게 추천동영상 목록에 올라 있는 채 몇 달을 지났었다. 그리고 몇 주 전부터 틈틈이 찾아보게 되었다. 아, 이래서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겟타로보의 후속작, 혹은 오마주라 그러는 거로구나. 그렌라간의 '나선력'을 겟타로보의 '겟타선'으로 바꾸면 거대화된 그렌라간은 우주단위의 크기로 성장한 겟타로보와 이어진다. 아마 그래서 더 일부러 거친 뎃셍선을 살려가며 그 느낌을 온전히 전하고자 노력한 것일 게다.
논리 같은 건 필요없다. 합리성이나 개연성 같은 건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겟타로보가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합체하고 변신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 없이 그냥 합체하고 그냥 변신한다. 과학적으로 과연 그런 것들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따위 없이 겟타선이라는 단어 하나로 작품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 다만 역시 너무 작위적이라는 게. 일본만화를 너무 보았다. 그래서 일본식 클리셰들이 너무 익숙하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저렇게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과 기대는 그대로 현실이 된다.
한 가지 역시 거슬리는 점이라면 로시우에 대한 묘사와 평가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대부분 독재자들은 오히려 사욕보다는 공적인 책무를 위해 서슴없이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인물들이란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처럼 정작 자신은 검소하고 금욕적인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타인에게도 엄격할 수 있다.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 만큼 자신을 연민하면서 더욱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게 된다. 실제 로시우가 그랬다. 정작 무고하게 시몬을 기소하고 재판하여 사형을 선고하고서는 그런 자신을 불쌍히여기며 자신의 행동까지 정당화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작 작중 인물 가운데 누구도 그런 로시우의 독단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작품의 주제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일본의 현실은 이토록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는가. 그래서일 것이다. 전부터 일본 대중문화를 접하며 느낀 부분이다.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 가운데 하나인 '와'는 상대의 과오까지도 포용하려는 경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분명 잘못되었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래도 좋은 점이 있으니 인정하고 방치한다. 낡은 조직을 개혁하겠다며 시작된 시도들이 그렇게 아주 사소한 장점들로 인해 오히려 가로막히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로시우도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 잘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독재였다. 사람의 목숨까지 마음대로 이용하는 횡포가 있었다.
인정이 가치에 대한 판단보다 우선한다. 그렇기에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조치 없이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인간의 진화란 가치와 질서와 제도와 구조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현실의 구조들이 정신이라는 상부의 구조를 정의하고 지탱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가치인가? 그런 명징한 해답 없이 그저 정신만 강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안티 스파이럴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목숨마저 수단으로 삼아 내던지는 모습에서 과거 구일본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기술과 전술과 무기라는 물적 체계 없이 정신력만 강조한 결과 인간을 수단으로 내몬다. 인간이 목적이 되려면 그 인간을 위한 수단이 정비되어야 한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면서 그 인간의 희생은 때에따라 정당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목적이란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째서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의지를 위해서. 자신들의 의지를 위해서. 그런데 그 의지란 엄밀하고 치열한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로시우조차 이성이 아닌 공포에 쫓기며 그런 판단들을 내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를 위해 인간은 어떤 행동들을 해야 하는가. 그 위에 인간의 의지를 놓고, 인간의 정신을 놓고, 인간의 감정을 놓는다. 과연 그런 것들을 인간의 본질이라 정의할 수 있는가. 그를 위해 인간을 희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오래전 방영한 데자키 오자무의 애니메이션 '보물섬'의 오마주인 듯 보였다. 데자키 오자무 특유의 하모니 기법이 마지막회 전반을 거쳐 오마쥬되고 있었다. 시몬이 실버였을까. 하지만 애니메이션 보물섬을 본 사람이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실버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인간은 발전하는데 그 세월 만큼 남겨진 이들이 있다. 나름 재미있기는 했는데 역시 느끼는 것을 일본놈들과는 생각이 너무 달라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걸 일본인들은 멋있다 말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하찮다. 그를 넘어서 역겹다. 그러니 잃어버린 30년인 것이다.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지금 일본의 현실을 작품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대한 것만큼 재미있었고 기대한 것만큼 하찮았다. 갈수록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대중문화를 접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머리가 굳은 것인지 그런 다른 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가 쉽지 않다. 주제의식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 것은 결국 만들어진 곳이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이란 것이다. 발전도 퇴보도 없이 정체되어 죽어가는 안티 스파이럴 그 자체다. 하긴 자학 역시 일본 특유의 사고방식 중 하나이기는 하다. 자학은 겸손이고 반성이다. 되도 않는 소리다. 덕분에 일본은 정체하며 뒤쳐져가고 있다. 다행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