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설강화의 이유 - 대중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는 이유
원래 예술이란 비효율적인 것이다. 효율적이면 예술이라 할 수 없다. 대량생산되는 피카소를 생각해 보라. 공장에서 거의 무한으로 찍어내는 로뎅을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르누아르는 단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 르누아르인 것이다. 세잔 역시 역사상 오로지 그 한 사람 뿐이기에 세잔일 수 있는 것이다. 당대에 유명했어도 결국 여럿 가운데 하나라면 이름도 기억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런 예술을 과연 필요한 만큼 생산에서 값싸게 팔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현대미술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아주 오래전에는 실제와 똑같이 모사하는 것만으로도 그 실력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실제 사람과 똑같이 그리고, 실제 동물과 똑같이 조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자신의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부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획득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후대로 전함으로써 자신의 이름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같은 이전의 기술들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라도 실제와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공장에서는 실제와 똑같은 조각품들이 양산되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미술가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가.
다수 대중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생각하는 직관적인 판단은 그래서 대부분 옳다. 그건 있는 놈들을 위한 것이다. 가진 놈들 알아보라고 그러는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예술이란 생산성과는 상관없이 예술가가 원하는 만큼 긴 시간 동안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 것이었다. 생산성과 실제의 필요를 고려한 것들은 달리 공예품이라 불리웠었다. 조금 더 보기 좋고 조금 더 예쁘고 조금 더 멋있는 그러나 실제 쓸모가 있는 것들과 예술은 그렇게 출발부터가 달랐다. 과연 누가 예술작품을 하나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에 대한 적절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런 이들을 위해 처음부터 예술은 존재했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중이다. 과연 나같은 월급쟁이가 그 비싼 돈을 지불하고 미술가의 그림을 얼마나 살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나같은 월급쟁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그림을 얼마나 그려야 미술가는 생계를 유지하며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순수예술만 그런가면 대중예술 역시 큰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 예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한 편 제작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들어간다 생각하는가. 영화 한 편 만드는데 수 백억은 기본으로 깨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돈은 일단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야 대중으로부터 회수할 수 있다. 그나마 대중이 직접 대가를 지불하는 공연예술조차 그래서 상당한 금액을 선불로 지불할 수 있는 자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하물며 직접 지불할 수 없는 다른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대중예술이란 말과 달리 많은 대중예술들이 대중들로부터 유리되는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중예술을 제작하는데 초기자본을 제공할 수 있는 일부의 의사가 대중예술에 더 깊이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PPL이다. 대중이야 뭐라 욕하든 PPL 없이 현실적으로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만들기 힘들다. 어떻게든 PPL을 많이 따내야 예능을 만드는데도 부담이 적어진다. 그래서 대중의 반응과 상관없이 PPL을 위한 장면들이 드라마나 예능에 삽입되고 하는 것이다. 대중은 욕하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제작에, 출연진과 제작진의 생계에도 그 편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jTBC가 시청자들에 싸움을 걸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진정으로 대중의 눈치를 보고 대중의 관심과 인기에 기대 수입을 얻는 구조라면 감히 대중들에 비판을 처벌하겠다며 싸움을 걸 수는 없는 것이다. 대중이 비난을 하면 차라리 그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려야 할 텐데 대중이 욕하는데도 욕하면 법을 이용해 처벌하겠다며 아예 선전포고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설강화'를 방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그로 인해 jTBC 전체에 대한 불매까지 벌어지려는 상황이다.
결국 돈을 지불하는 누군가의 의지인 것이다. 대중이 아닌 직접 돈을 지불할 누군가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모두가 예상한 바다. '설강화'는 상업적인 성공을 바라고 만든 드라마가 아니었다. 출연한 배우들이나 제작에 참여한 가수들 역시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하고 작품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설강화'를 만들고 제작에 참여한 것은 그보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제공할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물론 성시경은 예외다. 그는 '팩트'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드라마의 의도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상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드라마의 취지와 비슷한 발언을 하는 정치인이 있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비슷한 주장을 하던 정치세력이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다. 지난 총선 이후 어느때보다 민주화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주화세대와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이들이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아우른다. 어째서 진중권이며 진보적이라는 대중예술인들까지 jTBC의 편에서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가.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잘못된 민주화운동이었다. 한겨레의 결론이다. 정의당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동안 조선일보와 국민의힘 등 군사독재의 후신들이 줄곧 떠들어 온 것들이었다. 그래서 만들었다. jTBC가 대중의 불매에도 불구하고 버텨야만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바로 그들이다. 대중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산 증거라 봐도 좋을 것이다. 대중은 반대해도 KBS의 수신료는 올려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저들을 위해서.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