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스파이 패밀리 - 가족이라는 가면

까칠부 2022. 7. 9. 05:49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아버지라는 가면, 어머니라는 가면, 자식이라는 가면, 친구라는 가면,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가면은 자신의 실체가 된다. 바로 페르소나다.

 

처음부터 충신이 아니었다. 교육을 받는다. 사대부는 충신이어야 한다. 선비라면 마땅히 자신이 섬기는 임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그래서 처자식까지 모두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대부는 충신이 된다. 그것은 그의 본질이었을까? 아니면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강제에 의한 것이었을까?

 

원래 오래전 가족이란 단순한 혈족을 의미하지 않았었다. 집 가家라는 한자부터 집안에 함께 거주하던 돼지를 가리키는 상형문자였다. 한 집에 살다 보니 가족이 된다. 한 집에 살며 모든 것을 함께 겪고 기억하다 보니 당연하게 가족이 된다. 그렇게 한 집에서 살던 원시적인 구성원은 가족이 되었다. 뿌리가 다르고 혈연과 지연이 다르더라도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바로 군사부일체다.

 

내가 신하가 되려 하기에. 스승이 되려 하기에. 부모가 되려 하기에. 의식이 사고를 지배하며 인지가 행동을 결정한다. 부모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이고자 했고 남편이려 했었다. 딸이고자 했었기에 아냐는 딸이 되었다. 어머니이고 아내가 되려 했기에 요르는 아내가 되었고 어머니가 되었다.

 

어쩌면 좁은 한반도에 갇혀서 오랜동안 큰 굴곡없이 안정된 일상을 누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사실 가족에 혈연이란 것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중세 유럽의 농민들은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다면 아내의 부정도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누구의 핏줄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얼마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래서 초야권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 핏줄을 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고아였던 것이었다. 누가 아버지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가족이란 자신이 누구의 피를 이었는가가 아닌 가족에 있어 자신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에 있다. 가족이 필요했기에 아버지가 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된다. 의식이 행동을, 나아가 정체를 정의한다. 아버지이고자 하기에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고자 하기에 남편이 된다. 아내이고자 하기에 아내가 되고 딸이고자 하기에 딸이 된다.

 

한반도인의 핏줄을 이었지만 정작 그는 당나라 조정을 위해 이민족인 토번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한반도인인가? 아니면 당나라 사람인가? 정체란 의지다. 의식이 아니다. 인지가 아니다. 남편이고자 하니 남편이고 아버지이려 하니 아버지다.  백인이려 한다면 흑인도 백인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오히려 가족은 상당히 후대에 나타난 개념이다. 그 전에 일족이 있었다. 한 울타리 아래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여진 출신임에도 이지란은 조선인이 된다. 아니 유럽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모국이 따로 있어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주군을 위해 그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었다.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남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다음은 아냐였다. 아냐는 딸이어야 했다. 남편이 있고 딸이 있다. 요르에게 다른 선택지란 없다.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식이 그들 자신을 지배한다.

 

가족이 가족이 되는 이유, 민족이 민족이 되는 이유, 그리고 결국 이방인인 자신들이 우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스파이와 초능력자와 암살자가 모여서 스스로 가족이고자  한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체라는 것이다. 나는 나로써 증명되지만 다른 무엇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정체를 증명해야 한다.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된다. 엄마가 되고 딸이 된다.

 

 

타인이다. 이전까지 한 번도 접점이랄 것이 없는 사이다. 아버지가 되고 딸이 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된다. 인간의 정체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공자가 성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르는 아내이고 엄마다.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