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유희열 표절의혹과 창작에 대한 대중의 수준, 냉소적인 이유

까칠부 2022. 7. 11. 07:00

몇 년 전이다. 임재범이 '고해'를 자기가 만들었다 했더니 한 작곡가가 지랄한 적이 있었다. 전체적인 곡을 완성한 것은 자신이다. 그러므로 '고해'를 작곡한 것은 자신이다. 거기에 부화뇌동한 떨거지들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 듣고 얼마나 어이없었던가. 모든 창작자들이 바라는 것은 몇 마디 안되는 그 주제에 있다.

 

많은 창작인들이 장착의 고통에 자신의 영혼마저 끊어내는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일 것이다. 주제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를 변주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미술가든 소설가든 영화감독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짧고 굵고 핵심적인 단 하나다. 그를 위해 많은 창작인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고 자신을 학대한다. 어느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자신만의 그것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기술자와 창작자의 차이다. 단 하나, 단 한 마디,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주제, 그를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하나를 만드는 것이 어렵기에 세상에는 천재와 범재가 존재한다. 천재와 수재가, 천재와 영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미적분이 존재한다면 수학을 배운 대부분은 그것을 계산할 수 있을 테지만 그 미적분을 발견한 자체가 업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재범은 당당하게 '고해'를 자기가 만들었다 한 것이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다. 무지하고 무식하고 몽매한 대중들만 그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완성했으니 그 곡에 대한 권리는 마무리한 작곡가에게 있다. 그래서 표절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주제와 상관없이 그를 기술적으로 다르게 완성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다른 점들 만큼 그의 실력으로 인정될 수 있다.

 

유희열 표절의혹의 이유인 것이다. 기술과 창작을 혼동했다. 기술을 오히려 창작의 위에 놓고 있었다. 그래서 임재범은 비난받고 기술적으로 완성한 작곡가는 동정을 받았다. 몇 마디가 다르니까, 키가 다르고 코드의 진행이 다르고 악기의 구성도 다르니까. 그러니까 다른 곡이다. 그래서 유희열은 천재였던 것이다. 나중에는 그런 노력조차도 필요가 없었다.

 

어째서 조영남은 무죄인 것인가? 작품의 주제를 정하고 그를 위해 전문예술가의 기술을 빌렸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작품인가? 하지만 기술이 다른 사람의 것이니까. 예술이란 기술인가? 영감인가?

 

기술자를 우대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창작자의 영감을 우습게 여긴다. 김태원이 자기복제라 비난받는 이유인 것이다.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다양한 음악을 시도할 수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스타일을 고집한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다양한 영감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수없이 다른 다양한 하나라는 것이 허락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지문처럼 창작자의 작품에는 흔적이 남는 것이다. 피카소이기에 피카소만의 흔적이 남고, 마네와 모네이기에 그들만의 흔적이 작품에 남는다.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타인의 것을 훔치는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다양한 생소한 음악을 하는 것을 찬양한다. 고집스럽게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을 비난한다. 기술을 옹호하고 영감을 비하한다. 거기서 이미 이번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임재범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이 기술적으로 완성한 작곡가에 귀속된다. 그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가 기술적인 부분에서까지 게을러지고 무심해진 유희열의 창작물들인 것이다. 그대로도 상관없다. 기술조차도 영감의 일부다. 그러니 그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완성하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자칭 네티즌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오래전부터 그놈들은 그래왔다. 유희열에 대한 비난이 같잖은 이유다. 그 수준으로 누구를 욕하는가? 한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