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양조의 시작, 첫막걸리와 청주의 만족감
요즘 집에서 술을 만들고 있다. 시작은 우연히 중국산 증류기를 4만원 대에 세일해 파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값싼 담금주를 증류해서 보드카를 만들어보자. 사실 소주에 쓰이는 국산 주정은 매우 품질이 좋아서 유력 보드카 생산업체에서도 수입해서 쓰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따로 초류를 버리지 않아도 되는데 원래 증류란 그런 것이므로 초류랑 후류를 분리해가며 담금주 증류했더니 60도짜리 이과두주도 그냥 마시는 내가 그냥은 못먹을 물건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확실히 탄산수에 과일청 넣어서 하이볼 만드니 오히려 어지간한 보드카보다도 맛이 있다. 재미있다. 그래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어차피 중국산 증류기의 술통이 발효통을 겸하는 것이라 한 번 만들어보자 했던 것이었다. 더불어 원래는 고두밥 만들고 식히고 하는 자체가 일이라서 나중에 일 그만두면 한 번 소일거리삼아 해볼까 하던 것이었는데 생쌀을 바로 당화시켜준다는 개량누룩의 존재를 알게 되어 시험삼아 해보게 된 것도 있었다. 그래서 효모는 따로 넣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제빵용 효모까지 넣어서 한 번 만들어 본 것인데 이게 의외로 꽤 잘되었다. 너무 잘되어서 주말이라 인터넷 주문이 안되어서 일부러 마트까지 가서 더 비싼값에 쌀가루를 사들고 와서 덧술까지 해야 했다. 문제는 저 제빵용 효모인데, 이게 따뜻한 온도에서 활발해지는 놈이라 날 추워지면 활동이 약해진다. 그런데 지난주 갑자기 날이 추워졌지? 갑자기 발효통의 에어락으로 올라오던 기포가 사라졌다. 하아... 역시 와인효모를 썼어야 하는 걸까?
아무튼 의외로 첫술이 잘 되어서 하는 김에 하나 더 만들어 보자고 발효통도 하나 더 사서 이거는 유자청 넣고 와인효모도 넣고 덧술까지 두 번이나 해서 지금 열심히 발효 중이다. 처음 만든 놈은 이걸 어찌할까 하다가 그냥 2주만에 열어서 바로 걸러 버렸다. 역시나 발효가 되다 말았다. 지게미는 억세고 술도 도수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결과물인 술이 꽤 맛이 있다. 나는 내가 청주를 무척 싫어한다고 여겼었는데 바로 소주로 증류해야지 했던 청주가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그냥 병입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그대로 마시고 있는 중이다. 진한 누룩의 향기와 곡물의 향기가 진짜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예전 맛있는 술을 두고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하는 것을 그냥 대강 이해하고 말았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실감했다. 잘 만든 술은 이런 맛이 나오는 거구나. 다시 말해 내가 청주를 싫어했던 것은 술들이 그냥 맛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문제는 청주를 거르고 남은 막걸리인데... 더럽게 힘들다. 지게미 짜서 막걸리 거르는게 진짜 죽도록 힘들다. 짜다짜다 너무 힘들어서 그냥 막걸리수육 만든다치고 지게미째로 돼지고기를 재워 버렸다. 워낙 쌀가루 자체가 잘 떨어지지 않는 터라 구이는 서걱거리고 좀 식감이 아니었는데 하루 숙성해서 수육으로 만드니 지게미의 풍미가 꽤 독특하게 고기의 맛을 살려준다. 고기가 부드러워진 건 모르겠고 두툼한 지방에도 훨씬 맛이 담백하다. 덕분에 이틀동안 거른 술 세 병을 고기 한 근에 해서 다 먹었다. 이래서 집에서 술을 만드는구나. 막걸리는 진짜 오래전 동네 도가에서 받아 먹던 그 맛이다. 누룩향이 진한 게. 그리고 이래서 고급막걸리를 먹고 요거트 먹는 맛이라 그러는 것이구나. 힘들게 거른 막걸리가 찐득하니 쌀맛도 강하고 아주 구수하다. 그러면서도 톡 쏘며 올라오는 알콜의 맛이 진짜 술마시는 맛이 난다. 굳이 비유하자면 옛날막걸리에 보드카로 도수를 높인 느낌이랄까? 조금 더 오래 발효시켰으면 더 나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 다시 발효통에다 밑술부터 만드는 중이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바로 와인효모로 발효에 들어갔다. 10도 이하의 온도에서도 와인효모는 꾸준히 활발하게 밑술에 기포를 만들어낸다. 앞으로 3주를 보고 있다. 한 달은 발효시키고 걸러야지. 이번 건 너무 일렀다. 일단 제빵용 효모를 양조에 쓰는 것부터 아니었다. 도수가 생각보다 낮았던 것도 아마 그때문일 듯. 대신 도수가 낮아서 마시기 좋기는 하다. 소주로 증류하기에도 너무 도수가 낮아서 애초 목적과 거리가 한참 멀어졌다. 원래는 증류해서 소주로 마시려 그랬던 건데. 발효통이니 뭐니 항시 두고 쓸 것들 빼고 재료로 들어간 것들만 대략 2만 5천원 돈, 그리고 얻은 게 다섯 병의 청주와 세 병의 막걸리다. 청주가 좀 더 많았다. 힘이 딸려서. 압착기부터 사야지. 굳이 집에서 만들필요 있겠는가 했었는데 효과는 확실하다. 맛있다. 보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