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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들이 보리로는 막걸리를 빚어 드시지 않았던 이유?

까칠부 2023. 12. 10. 12:16

원래 맥주의 근본은 밀맥주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연히 빵을 만들 수 있는 밀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값비싼 곡물이었다. 아무나 밀로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가는 당장 먹을 빵조차 부족해질 수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값비싼 밀로 만든 밀맥주는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일반 백성들은 값싼 밀로 만든 맥주만을 먹게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맛있기는 보리로만 만든 맥주가 더 맛있는데?

 

맥주순수령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때문이었다. 맥주는 오로지 보리와 물과 홉으로만 만들어야 한다. 실제 맥주를 사 마실 대도 다른 재료가 들어가면 일단 기피하고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다. 칭따오도 주재료에 쌀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거들떠도 안 봤었거든. 덕분에 오줌을 거를 수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랄까. 아무튼 그래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다양한 맥주들 가운데서도 특히 보리와 홉과 물만 사용한 독일이나 체코 쪽 맥주만을 골라 마시고는 했었다. 그에 비하면 밀로 만들었다는 밀맥주는 독일에서 만들었어도 뭐랄까... 미묘한 막걸리같은 느낌이랄까? 예전 밀막걸리에 물 더 붓고 탄산 더하고 홉 추가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달달한 맛에 가끔 먹으면 맛나기는 하지만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 게 그런 것들을 즐기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밀맥주를 먹느니 차라리 막걸리를 마신다. 그래서 의문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밀맥주가 맥주의 근본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집에서 술을 만들기 시작한 김에 보리로 막걸리를 만들어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물론 전분이 풍부한 유럽산 보리와 같은 품종은 아니었다. 그나마 밥지어 먹기 좋은 종류의 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원래의 보리와 더 가까웠을 것이다. 몰트가 없으니 엿기름을 구하고, 대신 부족한 전분을 보리에서 채웠다. 한참을 식혜 만들듯 삭혀서 맥즙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다. 하아... 그렇다고 보리의 탓만은 아닌 것이 쌀로도 비슷한 짓을 했더니 그냥 구수하기만 하다. 설탕을 넣지 않은 식혜는 그냥 구수한 쌀물이다. 그래도 보리는 뭐랄까... 확실히 이래서 보리로는 조상님들도 식혜를 만들어 먹지 않았구나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식혜는 물론 막걸리도 보리로는 거의 만들어 마시지 않았다. 보리를 싹틔우면 엿기름이 만들어지고 엿기름으로 전분을 당화시키면 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 알았을 것임에도 굳이 보리를 재료로 술을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았었다.

 

어째서 맥주만드는 원액 키트에 감미료가 추가되어 있는가 새삼 확인할 수 있기도 했었다. 그렇게 기껏 만든 별로 달지 않은 맥즙으로 그냥 발효시켰더니 하아아아아... 그나마 내가 재료를 아끼지 않아서 보리향은 무척 진했다. 홉향도 진해서 맥주 먹는 맛은 낫다. 그러나 발효할 당이 부족하니 알콜감도 없고, 당연히 발효하고 남은 잔당이 없으니 맛도 달지 않다. 그나마 진한 보리향으로 먹을 만은 한데 탄산도 없는 주제라 이게 영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참다 못해 병입을 하고는 설탕을 듬뿍 추가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주일 넘게 지나니 그나마 먹을 만하게 바뀐다. 생각해보면 너무 발효를 오래 시킨 탓에 너무 그나마 있는 당마저 발효로 소비한 것이 원인이었지 않나 싶긴 하다. 한 사나흘 발효시켜서 바로 마셨으면 조금은 나아졌을까? 그래서 깨닫는 것이다. 이래서 맥주에 밀을 넣었겠구나.

 

실제 워낙 집에 있는 냄비들이 크지 않아 남은 보리로 쌀과 섞어서 막걸리를 만들어 보았다. 비슷하게 단맛이 없다. 그런데 그나마 쌀이 당화되면서 단맛이 올라오니 첫 일주째는 뭔가 싶었는데 이주째는 이게 꽤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는 막걸리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물을 섞지 않은 원주라 도수도 높다. 도수도 높고, 진한 보리와 쌀의 곡물향에, 탄수화물의 구수함과 당의 달달함, 그리고 홉과 누룩의 향이 더해지니 이게 꽤 괜찮다. 그래서 아예 엿기름으로 쌀을 당화시켜 식혜를 만들고 그것으로 맥주를 만드는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인데 역시 칭따오처럼은 되지 않을 모양이다. 일단 집에 있는 설비들이 전문적인 맥주를 제조할 수 있을 만큼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덕분에 사놓은 홉은 다 쓸 수 있어서 대만족 중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전분이 많은 보리를 쓰는 유럽과 달리 그렇지 못한 중국과 미국에서는 맥주에 맥아와 더불어 전분이 풍부한 쌀과 옥수수를 섞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위스키인데 미국에서 만드는 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재료로 하는 이유도 그래서 알 것 같다. 참고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옥수수로만 발효주를 하나 또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더불어 어째서 코첼 맥주의 성분표에 설탕이 들어가 있는가도 확인하게 되었다. 설탕이 그나마 들어가니 집에서 만든 맥주도 그럴싸해진다.

 

한 마디로 맥아는 전분을 당화하는 효소인 아밀라아제를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 술만드는데 어떤 이점도 장점도 없다 할 수 있다. 결국 술을 만드는 것은 효모고, 그 효모가 술을 만드는 재료는 포도당이다. 그 포도당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당질 - 즉 탄수화물에서 나온다. 곡물은 그것을 전분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전분을 가장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전세계가 보편적으로 식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곡물들이다. 쌀이나 밀, 혹은 옥수수와 같은. 어째서 기르기 더 용이하고 생산량도 적지 않은데 보리는 오랜 시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해 왔었는가. 어쩔 수 없이 주곡물이 부족하니 방법을 찾아 먹기는 하지만 대개는 주곡물을 더 선호했었다. 그리고 얼마전 추가하게 된 이유 하나는 결국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술을 만들 수 있는 곡물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술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곡물에 우선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쌀로 다시 술을 만들기 시작하니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일단 술이 익는 냄새부터가 다르다. 달달하게 확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보리와 쌀의 차이를 보다 근본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보다 묵직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보리막걸리도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아마도 보리의 섬유소 때문인지 구수하고 독한 맛에 묵직한 바디감이 더해진다. 그런데 맥주는 시원하고 가벼운 맛이란 말이지. 내가 물을 아껴서 그렇다. 물을 아끼는 탓에 모든 술이 진하고 독해진다. 맥주는 그런 점에서 나와 맞지 않는 술일지도.

 

결론은 그래서 결국 맥주에 홉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홉이 들어가기 전에는 다양한 향신료가 쓰이고 있었다. 지금도 특히 에일 등에 오렌지껍질과 같은 독특향 향을 내는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전분이 부족하니 단맛이 적고 따라서 그런 단점을 보완할 다른 수단을 찾아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도달하게 된 해답이 바로 이제는 맥주 그 자체가 되어 버린 홉이었을 것이고. 홉이 들어가지 않은 맥주를 마셔보면 바로 알게 된다. 차라리 막걸리를 마시지 그런 맥주는 마시고 싶지 않다. 그런 점에서 홉이 없었을 때 밀맥주는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밀이 귀한 곡물이라는 점만 제한다면.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