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와 살인...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존엄을 확인한다.
왕따는 그것을 단절시킨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소설에서 개미를 죽이는 법에 대해 나온다. 개미의 관계를 단절시키면 개미는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당한다.
인격에 대한 부정이다. 존재와 존엄에 대한 거부다. 살인이 직접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이라면 왕따는 인간의 가치 자체를 배제해 버린다. 그 트라우마는 어쩌면 평생을 가게 될지 모른다.
사람을 죽인 것은 물론 죄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평범한 한 병사였다.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어쩌면 소심하기까지 한 나약한 한 개인이었다. 그런 개인이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다. 어째서일까?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까짓 따돌림. 그까짓 무시. 그까짓 괴롭힘. 죽이지 않았으니까. 때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군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마저 군대로 끌고가는 징병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병제를 반대했지만 생각을 달리한다. 따돌림을 당연하게 여기는 수많은 예비역들을 보면서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고 가서는 안되는 사람은 보내서는 안된다.
안타까운 사건이다. 결국은 죽은 이들도 그들을 죽인 당사자도 피해자들일 것이다. 징병제라고 하는 제도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아니었으면 사회에서 나름대로 큰 사건사고 없이 잘 살았을 사람들인데.
군생활을 해봤으니 안다. 그럼에도 왕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함께 어울릴 수 없다. 도저히 상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 전출은 개인의 권한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조라 하는 것이다.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선택이기도 할 것이기에.
어느쪽이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슬픔이다. 인간은 어째서 이리 슬픈가. 세상이 슬픈 것일까. 아니면 인간 자신이 슬픈 것일까.
언젠가는 그런 구조적인 모순들이 바로잡히기를 기대하며. 명복을 빈다. 위로해주고 싶다.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