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 - 백승수에게서 단장을 지우고, 그의 남은 빈자리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책임감으로 인해 어느새 체념과 포기에마저 익숙해저 버린 이들이다. 온전히 혼자서만 모두 책임져야 하기에 타인에 대한 기대 같은 건 머릿속에서 아예 지우고 시작한다. 그래서 도저히 혼자서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 기대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먼저 떠나 버리고 만다. 아니 아예 그런 상황을 예상하여 떠날 준비까지 모두 마치고 모든 것을 시작한다. 백승수가 냉정해 보이는 이유이고 그러면서 누구보다 열정적일 수 있는 이유다. 한 편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이번 회차는 백승수에게서 단장이라는 직책을 지움으로써 자연인 백승수에 대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권경민에 의해 단장이라는 직책이 지워지고 이세영으로부터 백승수씨라 불리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바로 찾아간 것이 음식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던 늙은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는 동생이 사고를 당하던 무렵 쓰러진 아버지가 입원해 있었다. 백승수에게 많은 돈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백승수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야 했던 이유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역시 비슷한 무렵 있었을 것 같은 전처와의 지난 이야기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어떻게 처음 스포츠팀 단장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사연도 동생 백영수를 통해 가볍게 흘려 들려준다. 백승수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해 왔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매우 이기적일 것이다. 이기적이라기보다 그렇게밖에 달리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었다. 당장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까지 생각할 여유 같은 건 가져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아직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을 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책임까지 강요받아 왔었는지 모른다. 그러고보니 장남이다. 장차 부모를 대신해야 하고 당장 부모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소심했을지 모른다. 소심한데 지나치게 성실하다. 힘들다 말도 못하고, 어렵다 말도 못하고, 아프다고도 쉽게 말을 못한다. 그래서 혼자서 감당하고 혼자서 아파하며 혼자서 헤쳐나간다.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선의는 그런 사람들에게 또다른 책임으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책임져야만 한다. 남은 임기 동안 보장되어 있던 연봉까지 포기하며 이세영 팀장의 선의를 받아들여 정해진 기간 동안 그들과 함께 하려 한다. 백승수 단장을 도우려 한 행동이지만 오히려 그를 떠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그런 식으로밖에 다른 방식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떤 이유로 아버지가 말한 아내 뱃속의 아이를 잃고도 제대로 울지조차 못하고 지금껏 견뎌왔을 것이다. 아마 아내의 눈물 앞에 자신의 눈물을 보일 수 없기에 그저 자신만을 탓하며 지금껏 혼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 왔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자신과 서로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자기 탓인 것 같고 자기가 잘못한 것만 같다. 무엇보다 서로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서로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한없는 죄책감이었을 터다.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다른 사람의 선의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선의에 기대면서. 그러면서도 온전히 그들을 책임지며 자신을 포기하려는 것은 백승수답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에 그렇게 행동해 왔다. 이렇게 행동하려 한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꿰뚫는 기둥 같은 것이다. 그렇게 드림즈라는 팀에서 백승수는 '자신의' 팀과 함께 어떻게 얼마나 성장해 갈 것인가.
그냥 주어진 일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말 그대로 리더다. 이세영이 백승수에게 요구하는 부분이다. 팀으로서 드림즈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동안 계속해서 꼴찌만 하면서도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모두를 다잡고 함께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이가 없었다. 전단장도 결국 리더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비전을 보여준다. 모두에게 희망을 가지게 한다. 처음 반발하던 코칭스태프며 프론트가 어느새 백승수를 인정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분명 드림즈는 백승수가 단장으로 온 이후 더 나은 방향으로 더 강해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 확신이 어느새 자신들 안에서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그 희망을 지켜달라. 그리고 안타깝게도 백승수는 그런 이세영의 선의마저 자신을 위한 책임으로 바꾸고 만다. 딱 거기까지만 자기가 해 줄 수 있기를.
증오란 그래서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를 파괴해서라도 상대를 망가뜨리고 싶다. 상대에게 아주 작은 상처라도 입히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권경민의 각오가 읽힌다. 그 서럽도록 선명한 의지는 그의 또다른 약한 내면일 것이다. 상처입고 울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그 안에 숨어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백승수는 그런 권경민의 악의와도 기꺼이 타협하고 만다. 다만 길창주를 찾아가 그들의 아이를 안고 흘리는 눈물에서 백승수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지는 않을까. 자신은 더이상 장남도 아니고 가장도 아니다. 팀의 구성원들은 오로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아니다. 무작정 자신을 희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에 대해서도. 가족이란 것이 부모 자식이라고 일방적으로 부양하고 부양받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책임의 대상이기보다 백영수의 말처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대등한 개인과 개인으로서. 그러면 권경민에게도 어떤 계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반드시 백승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드림즈의 프론트가 마냥 무능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배부른 돼지들이 아니다. 백승수 혼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백승수의 빈 자리 만큼이나 그 자리를 채워가는 스탭들의 노력과 역량들을 보여준다. 혼자가 아니기에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필 제목이 스토브리그라서. 딱 개막전이 시작되기 전 시즌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이슈들이 그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굴까. 쉴 새가 없다. 시계를 볼 시간조차 없다. 어느새 벌써 9회가 지나간다. 과연 드림즈는 함께 시즌의 시작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이 토요일이 아님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