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 정도전의 치명적 모순, 밀본과 민본
아무래도 모순된다. 공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 했었다. 오로지 제도와 율령으로써 다스려지는 나라를 세우겠다 말해 왔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선비들을 모아 자신이 주도하여 결사를 만든다. 이들이야 말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갈 숨은 뿌리-밀본(密本)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공론이고, 어떤 제도이고 율령인가?
그동안 의문이었다. 만일 진정 정도전(김명민 분)이 밀본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조선건국 이전이어야만 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라면 이미 늦다. 새로운 나라 조선에 대해 그동안 자신이 천명해 온 바와 철저히 위배된다. 임금과 조정마저 속이고 나라의 법과 제도의 밖에서 오로지 자신들만의 논리와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해도 임금과 나라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불신하며 경계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쉽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실제 밀본의 역할이 그랬었다. 조선이라는 왕조의 체제 밖에서 왕과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선을 만들고 지켜가고 있었다.
만일 정도전이 진정으로 새로운 나라 조선을 위해 선비들의 단합된 힘이 필요하다 여겼다면 그마저도 공론으로, 공식적인 율령과 제도로써 나라의 체제 안에 그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다. 이를테면 선비들로 이루어진 의회와 같은 것이다. 유학을 배우고 유자로써 학식과 인품이 검증된 선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임금과 조정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나라의 공론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론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제도와 법을 새롭게 다듬는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거의 몽상에 가까운 가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차피 드라마는 픽션이고 밀본이라는 결사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단지 유자의 나라 조선을 위해 자신의 주장까지 배반해가며 밀본이라는 결사를 비밀리에 만들고자 했던 정도전의 선택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일 뿐이다. 그동안 드라마가 일관되게 지켜왔던 논리마저 스스로 부정하고 만다.
마침내 이방원(유아인 분)과 무휼(윤균상 분)의 얼굴에도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다. 아마도 의도한 것이었을 것이다. 멀고 위험한 여행을 통해 이방원과 무휼은 어느새 훌쩍 어른으로 자라나게 된다. 항상 아버지가, 스승이, 그리고 첫사랑이 그의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새 주위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어머니같고 아버지같던 할머니가 버티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 누구도 자신을 전처럼 귀하게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죽이겠다 협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런 협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짐짓 당당하게 맞받아쳐 보지만 잠시의 변덕에도 자신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항상 자신에게 엄격하던 아버지도 자신에게 가혹하기만 하던 스승도 마음편히 어리광을 피울 수 있었던 든든한 '내편'이었었다. 자신의 무사조차 마음대로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선택한 주군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버려져야 했던 그들이 이제 힘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홀로서기 위해. 부모도 스승도 아닌 오롯이 자신으로써 서기위해.
솔직히 이방원이 연왕 주체와 만나는 장면은 그다지 필요없는 사족이라 여겼었다. 굳이 중국에서 연왕과 어울리는 모습을 그렇게 길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가. 조선으로 돌아오고 나면 다시는 나올 일 없는 이가 바로 연왕이고 이후 영락제다. 나오더라도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필요했다. 집밖을 나가 제대로 고생을 해봐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것을 현실로써 받아들어야 한다는 체념, 그럼에도 그것을 이기고자 하는 용기. 아버지도 스승도 아니다. 아버지 이성계(천호진 분)나 스승 정도전처럼 자신에 대한 미련과 정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약해지고 마는 무른 상대가 아니다. 필사의 도박을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그 계기로 삼는다. 더 큰 굴욕과 더 큰 두려움이 마침내 어렸던 이방원을 어른으로 만든다.
반촌에서 분이(신세경 분)는 연통의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사실 고증오류다. 반촌은 원래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노비와 토지를 내리며 만들어진 곳이었다. 원래 선비라는 자체가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다. 노동으로 생업을 삼는 이들이 아니다. 오로지 유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기여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노비는 필수였다. 오로지 유학만을 힘써 공부해야 하는 자신들을 위해 다른 모든 일들을 대신 해 줄 노동력의 존재가 필수였다. 유학을 공부해야 하는 장래의 인재들을 위해 그들을 지원할 인력들로 마을을 만든다. 하지만 역시 드라마를 위해서 관군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백성들만의 치외법권지대가 필요했다. 분이와 연통이, 그리고 장차 밀본이 숨어들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다. 심지어 척사광(한예리 분)마저 공양왕(이도엽 분)이 죽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정체를 감추고 반촌으로 숨어든다.
그곳은 오로지 백성들만이 사는 별세계였다. 백성들의 나라였다. 분이의 나라였다. 그곳에서 분이는 곧 왕이었다. 조정의 관리조차 왕의 허락이 없이는 분이가 다스리는 나라 안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아무리 반촌의 행수라 하지만 비천한 계집에 불과한 분이를 상대로 목소리만 높일 뿐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의 관리를 대신하여 반촌의 마을사람들에 대한 처분은 분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한다. 어쩌면 분이가 꿈꾸던 나라였다. 밀본의 대의를 듣는다.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아끼고, 백성을 존중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백성을 살게 한다.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다. 하필 밀본을 만들며 정도전이 하는 연설을 분이도 몰래 숨어서 엿듣게된다. 부디 또다른 비극으로 향하는 열쇠가 되지 않기를. 드라마도 꿈을 꾼다. 역사에 없었던 현재의 꿈이다. 그 꿈속을 분이가 노닌다. 과연 그곳에서 척사광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소박한 바람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운명은 항상 비극으로 찾아온다.
무명의 영향력은 심지어 압록강 건너 요동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하기는 무명의 무극 연향(전미선 분)이 죽은 초영에게 내린 밀명부터 명나라로 가서 정도전에 맞설 계략을 꾸미는 것이었다. 이방원이 연왕 주체를 상대로 도박을 하려는 순간 연향이 나타나 극적으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다. 장차 조카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연왕 주체였다. 장차 아버지와 스승마저 누르고 오로지 자신만의 실력으로 왕위에 오르게 될 이방원이었다. 욕망은 어디에나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 욕망이 없을 수 없다. 어쩌면 이방원이 무명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기 안에 숨은 간절한 욕망을 일깨우는 계기로서가 아니었을까. 욕망이 인간과 인간을 잇는다. 여전히 조선에 남아 정도전과 분이를 상대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향한 정도전의 꿈과 이상이 너무나 절절하다. 조선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 간관과 사관이야 말로 조선을 조선이게 만든 근본이었다. 이방원의 꿈은 욕망이었다. 정도전의 욕망은 이상이었다. 이방원이 돌아온다. 야생에서 훌쩍 성장한 무휼과 함께. 이방지와의 대결을 기대한다. 파국은 다가온다. 남은 시간들이 그저 안타깝다. 역사를 차라리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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