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 선죽교 전야, 물러설 수 없는 비장과 긴장의 끝에서
사소한 우연이 아니었다. 거대한 필연이었다. 당시 고려왕실은 명분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천호진 분)는 실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분을 지탱하는 것이 정몽주였고, 이성계 자신이 그 실력 그 자체였다. 정몽주만 죽는다면 고려왕조의 명분은 이름만 남게 된다. 이성계가 사라지면 이성계가 목표하던 혁명 역시 사라지게 된다. 둘만 사라지면 된다.
아직까지 고려는 왕씨의 나라였다. 왕씨의 고려왕실이 고려의 주인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단지 반역일 뿐이었다. 그리고 공민왕 이후 잦은 외침과 권신의 발호, 무엇보다 두 번이나 신하에 의해 왕이 바뀌며 추락한 왕권을 지탱하고 있던 것이 바로 유학자 정몽주(김의성 분)가 가지고 있던 개인의 명망이었었다. 도당과 사대부,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정몽주가 지지하고 지키고자 하는 고려이기에 아직 지킬 가치가 있다. 만일 누군가 정몽주마저 해치고 고려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사대부와 백성 모두를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명분을 실제 지키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은 모두 이성계 개인의 손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고, 이인겸 이후 계속된 권신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실력자였다. 동북면의 근거지에서 가별초라는 이름의 최정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전쟁영웅으로써 이미 최영이 건재할 당시에도 군부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나마 최영과 조민수마저 실각한 뒤로는 더이상 이성계 자신과 경쟁할만한 인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설사 이성계의 반역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토벌은 커녕 오히려 군이 그에 가담하여 돌아설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를 죽이려 했던 것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이성계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보겠다.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왕실이라는 명분을 쫓도록 만들어 보겠다. 그를 위해 이성계로부터 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김명민 분)을 떼어내려 했던 것이었다. 정도전만 이성계의 곁에서 사라진다면 정몽주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이성계의 결심을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성계까 말에서 떨어져서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미 죽었거나 잘만하면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성계의 모든 힘은 이성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사병인 가별초야 자식들이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전장에서 보여준 상승불패의 이성계의 실력과 명성까지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군부의 지지나 백성의 신망 또한 여러차례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 개인에 대한 것이지 혈연은 몰라도 단지 그를 따랐을 뿐인 사람들에 대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성계 한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 뿐인데 정작 이성계를 지지하던 군부가 이성계를 따르던 이들을 제거하려는 정몽주의 의도에 침묵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성계가 사라진다면 이성계 일파의 그 누구도 그를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성계의 생사가 중요했다. 최소한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이성계가 가진 실력의 핵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명분은 고려의 주인인 국왕(이도엽 분) 자신에게 있다. 이성계를 따르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고립된 이성계까지 제거한다면 고려는 안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성계가 멀쩡히 살아있다면 이성계의 보복에 자신들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국새까지 찍힌 교지를 받고서도 품에 넣은 채 이성계의 안위를 살피러 간다. 바로 이성계 일파에게 있어 이성계가 가지는 위치다. 이성계야 말로 시작이자 끝이며 전부다.
이성계 일파에게도 정몽주란 그런 의미였다. 정몽주마저 사라지고 나면 누구도 고려왕실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자신들에 맞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몽주라는 명분마저 잃고 나면 고려왕실이 가진 명분이란 그대로 껍데기만 남게 된다.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는 이름 뿐인 명분 따위 굳이 더이상 힘으로 무너뜨릴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아직 정몽주가 살아있다면 정몽주가 지키는 고려와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이성계 일파의 구심점이어야 할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라는 명분을 쫓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들을 돌려세워야 했다. 당장 정몽주의 존재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모두를 지켜야만 했다.
하기는 어떤 싸움인들 안 그렇겠는가. 결국 목적은 상대의 왕을 잡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의 왕을 잡아야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다만 이성계가 잡아야 하는 상대의 왕이 고려의 국왕이 아닌 정몽주라는 사실이 당시 고려가 처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과연 자신이 죽는다고 고려가 다시 살아날 것인가. 이성계의 물음에 정몽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정몽주 개인의 명망과 역량이 이름만 남은 고려왕실을 지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죽으면 정몽주가 승리하겠지만 그렇다고 고려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몽주만 죽으면 이성계와 정도전이 꿈꾸는, 이방원(유아인 분)과 모두가 바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이상이 현실이 된다.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성계를 죽여야만 했던 정몽주의 절박함처럼, 그래서 정몽주를 죽이려 하는 이방원 역시 간절하고 비장하다.
포기할 수 없는 꿈을 말한다. 죽더라도 절대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소중한 바람을 이야기한다. 소중한 사람과 적대하게 되더라도 결코 놓아서는 안되는 모두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오히려 이성계보다 절실하다. 이성계와 정도전에게는 단지 자신의 이상이고 신념일 뿐이지만 분이(신세경 분)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삶이고 현실이다. 자칫 정몽주로 인해 이상이 좌절된다면 다시 과거와 같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공포다. 차라리 자신들의 꿈이 좌절될 것이라면 그것이 누가 되었든 죽여서 막아야 한다. 아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방원의 등을 분이가 떠민다. 무휼(윤균상 분) 또한 망설임을 지운다. 상대가 제아무리 천하제일검 척사광(한예리 분)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싸워야만 한다.
과연 훌륭한 정치가란 어떤 정치가인가. 이성계와 이방원을 통해 대비하여 보여준다. 개인으로서 선하다. 사리사욕도 없고 표리부동하지도 않다. 오로지 신의와 인정으로서 사람을 여기고 대한다. 뛰어난 이들을 존경하고 바르지 않은 행위를 경멸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결심이었지만 그러나 이방원은 자신의 결정을 분이에게 물으려 하고 있었다. 모두가 바란다. 모두가 소망한다. 모두의 희망을 이룬다. 결정마저 분이에게 미루려는 이기가 결국 모두의 꿈을 이루어주는 이타로 바뀐다. 바로 권력인 것이다.
개인의 이기와 탐욕이 대중의 바람과 만난다.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필사적인 권력의지가 대중의 요구와 만나며 공약이 되고 정책이 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을 이룬다. 대중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준다. 이는 곧 대중의 지지가 되어 자신에게 권력으로 돌아온다. 때로 대중을 등에 업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행동에 대중이 기대기도 한다. 암살이라는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도 불구하고 이방지(변요한 분)와 조영규(민성욱 분), 무휼등 모두가 기꺼이 이방원을 따라나선다. 이방원의 행동에 자신들의 정의가 있다. 자신들의 꿈이 있다. 인간이 아닌 리더로서 이 순간 모두의 앞에 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방원 자신이었다. 자신의 탐욕이 모두의 꿈이 된다.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비장하고 가장 긴장되는 선죽교전야였을 것이다. 그저 몇 사람의 자객을 보내어 정몽주를 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이제까지 첨예하게 대립해 온 두 가지 서로 다른 대의가 마침내 정면으로 부딪히려는 것이었다. 이방원 개인의 욕망만이 아닌 모두의 의지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몽주의 곁을 지키는 것은 공양왕이 딸려보낸 호위 척사광 한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이 놓인 현실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정몽주에게는 뒤가 없다. 정몽주가 사라지면 더이상 고려에 내일은 없다. 이방원을 따르는 것은 그가 지켜야 할, 그리고 열어야 할 내일이다.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된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두 사람이 마침내 어둠속에 역사의 순간을 만든다.
뻔히 아는 내용임에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낯설면서 흥미롭다. 척사광과 무휼이 만난다. 척사광과 만난 무휼이 스승 홍대홍(이준혁 분)을 찾아 곡산검법의 약점을 묻는다. 분이에게 묻고 다시 척사광과 만나 대답한다. 이방원(유아인 분)은 홍인방(전노민 분)과 만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과 대화하고 있었다. KBS의 대하드라마 '정도전'과는 다르지만 정몽주와 이성계의 대화가 상당히 흥미롭게 진행된다. 이성계의 진심과 진정을 안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냉정함이 정몽주의 결심을 보여준다. 모두를 등지고 모두를 적대할 수 있다. 선택은 한 가지다. 죽거나 죽이거나. 오래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월요일이어서 다행이었다. 일주일에 2회를 방영하기에 더 다행이었다. 한 주를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비극이 아니다.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다. 오히려 이쪽이 원래의 역사에 더 가깝지 않을까. 서로가 최선을 다했다. 한 사람은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은 빼앗기 위해. 누가 누구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 필사의 결의가 마침내 부딪힌다.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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