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3 - 민족이라는 신화...
하긴 동질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한 서사가 아니었다면 그 수많은 죽음 가운데 유독 논개의 죽음만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지 못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죽은 사람만 최소 수 백만이다. 찔려 죽고, 베여 죽고, 맞아 죽고, 불타 죽고, 굶어 죽고, 목매달아 죽고, 물에 뛰어들어 죽고, 병들어 죽고... 하지만 그런 수많은 죽음 가운데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잡아끄는 죽음이 있었다. 무려 원수인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든 어느 여인의 죽음이다. 그녀는 왜 그때 그곳에서 왜장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 것일까?
부족한 부분은 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란 결여에 대한 보상이다. 아쉽고 간절한 바람이 상상이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생이 되어야 했었다. 가장 비천했어야 했으니까. 굳이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죽을 이유가 없는 신분이어야 했으니까. 그럼으로써 서사는 극적으로 완성된다. 살아남은 사람의 원망과 분노를 담아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차마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바람을 담아서. 일본놈들을 죽이고 싶다. 한 놈이라도 더 일본놈을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런 집단의 바람이 하나의 죽음을 신화로 만든다. 그리고 국가는 그 신화를 받아들여 국가라고 하는 서사를 완성한다.
국가라고 하는-혹은 민족이라고 하는 서사에 필요한 것은 순교자다. 정확히 채무자다. 을지문덕도 강감찬도 아닌 이순신이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성웅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나라를 위해 싸우고 큰 공을 세운 뒤 그 보상으로 높은 관직과 영화를 누렸다면 더하고 빼고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세운 공이 작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과 큰 영화를 누렸더라도 한 나라를 구하고 한 민족을 지켜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찌되었든 공을 세운 뒤에도 살았고 어떻게든 보상을 받았을 테니 그것으로 완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죽어라 고생만 했지 누린 것도 없이 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뭔 말이냐면 빚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국가에 희생한 순간 그것은 후손들에게 빚으로 남게 된다.
"너도 논개처럼 그렇게 할 수 있어?"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해야만 하니까. 그럼에도 하지 못할 테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국가적, 혹은 민족적인 영웅들은 불운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은 경우가 많다. 바로 자신들을 위해. 바로 우리들을 위해. 그가 돌려받지 못한 만큼 빚이 되어 자신들을 국가란, 민족이란 울타리에 얽어맨다. 그것이 동질성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국가고 한 민족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그리 살아야 한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디트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디트를 어떻게 해석하든 그 사실이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흔들어 놓지는 않는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던 유디트는 유대인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논개가 죽은 이유가 불의에 나라를 공격해서 잔인하게 백성들을 학살한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고? 자신이 사랑한 이를 죽인 이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아니었다는 것인가? 그러면 논개는 왜 죽은 것일까? 무엇보다 그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래서 차라리 여염의 아낙이 아닌 기생이어야 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후처도 첩실도 아닌 비천한 신분의 관기여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고 그렇게 서로 납득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 죽음은 의미를 가지고 자신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전승된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신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논개의 얼굴이 신의 초상을 닮았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확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누가 한국인을 만들었는가? 누가 대한민국과 한국인이란 민족을 창조했는가? 그 수많은 신화의 신과 영웅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관념 위에 자라난다.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불편하다. 아니 그보다 굳이 국가와 민족의 신화가 된 논개를 건드리고자 하는 이유다. 신화속의 신과 영웅을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새로운 신을 만든다.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마치 이전에 존재했던 신들을 차용해서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새로운 신화가 된다. 박경리의 일화마저 여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위한 신화가 된다.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는가는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다. 신화가 존재하고 그 신화를 믿는 신도들이 존재하는 한 신은 실재한다. 자신들의 신화를 만든다. 여성을 위해서. 혹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그래서 쓰여진 현대의 신화를 달리 전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번에는 출연자들과 상관없는 내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었다. 워낙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들 뿐이라 마주 이야기를 쏟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인간이란 무심하다. 굳이 상관도 없는 남의 죽음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기에는 이기적이고 냉정하다.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죽음은 의미를 가지고 기억된다.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억된다. 무어라 하기에는 그래서 이미 한국인이란 것이다. 여전히 한국인이란 것이다. 어쩌면 하잘 것 없기도 하다. 그 존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