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미안한 마음조차 상대에게 짐이 될 수 있음을 알았던 탓이다. 아무리 빚을 갚으려 해도 상대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기는 용서받으려 해도 상대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강요하는 것 같다. 차라리 부담을 지우는 것 같다. 그러니 아무일 없이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어 곁에 남으려 한다.
그래서 분이(신세경 분)도 울고 있었다. 연희(정유미 분)도 그 마음을 알았다. 처음부터 누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이방지(변요한 분) 역시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면. 홀가분해진다면. 딱 그 만큼이 시대가 그들에게 허락한 거리였다. 누구보다 이방지 자신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었고, 연희는 그저 그런 이방지를 지켜만 볼 뿐이었다. 자신이 용서한다 해서 용서될 일이 아님을 안다. 온전히 이방지 자신의 몫이다.
동생을 지키겠다. 연희를 지키겠다. 정도전(김명민 분)을 의지해 모인 사람들을 지키겠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을, 그들의 희망을, 자신이 가까이에서 지키겠다. 자신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꿀 자격을 잃었다. 동생을 버리고 연희를 외면했던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꿈을 꿀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을 위한 형벌이며 속죄다. 한 발 물러서서 시대의 주역이 아닌 도구가 되고 배경이 된다. 쓸모가 있다면 나를 쓰라. 절박한 외침이다.
반면 이방지 남매나 연희와는 달리 무휼(윤균상 분)은 단순하기만 하다. 처음부터 민초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짓밟히고 짓이겨져도, 가뭄에 마르고 홍수에 잠겼어도, 그러나 어느새 다시 들판을 뒤덮는 이름모를 잡풀들과 닮았을 것이다. 살아남는 법을 안다. 이기는 방법을 안다. 맞서지 않는다. 버티지 않는다. 굳이 덤비거나 이기려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저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저들이 가고 나면 또다른 누군가 저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의미도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저 이방원 밥통이다. 나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가장 냉정할 것이다. 거리를 두는 법을 안다. 굳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무휼의 검 역시 그런 자신과 닮았을 것이다. 이방지나 길태미(박혁권 분)의 그것과는 달리 전혀 혼란스럽거나 기괴하게 비틀리지 않은 우직한 직선의 검이야 말로 무사 무휼의 검이었을 것이다. 처음 검을 배우려는 목적부터가 매우 단순하고 분명했다. 이름을 날리고 높은 관직을 얻어 할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먹여살리겠다. 자기가 호감을 느낀 분이를 위해 무어라도 해주고 싶다. 다른 쓸데없는 번뇌나 고민따위 끼어들 틈이 없다.
백성이 무서운 이유였을 것이다. 그나마 이방지는 연희와 분이에게 얽매인다. 연희와 분이는 다시 정도전과 이방원(유아인 분)이라는 권력과 얽혀 있다. 만일 이방원이 무휼에게 약속한 밥을 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동생들이 굶어야 한다면? 그 순간에도 무휼은 대의를 말하고 있지 않았었다. 오로지 까치독사를 이기고 이름을 얻어 출세할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휼은 이방지의 반대편에 있다. 길태미와도, 이방원과도 전혀 반대편에 있다. 그를 주목한다.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자신의 길을 가게 될 것인가.
확실히 왕이 나오지 않으니 이런 재미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 조반의 일로 임견미와 염흥방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던 것은 다름아닌 당시 고려의 국왕이던 우왕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명이라는 명분을 쥐고 있었기에 최영(전국환 분)과 이성계(천호진 분)가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켜 임견미와 염흥방 일파를 공격하여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왕이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도댕에서 중신들이 그 과정을 만들어내야 한다. 마치 현대의 정치극같다. 도당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그 계략을 역이용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한 수싸움을 벌인다. 자신의 실책을 틈타 그를 도당에서 탄핵하려던 이성계와 정몽주의 의도를 역이용하여 홍인방(전노민 분)은 아예 해동갑족 전체와 이성계까지 옭아맬 함정을 파려 한다. 오로지 이방원만이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인겸이 먼저 해동갑족의 하나인 황려 민씨의 민제(조영진 분)와 사돈관계를 맺어 그들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원래 홍인방 자신이 이인겸을 몰아내고 겨우 손에 넣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해동갑족과 연대하고자 민제의 딸 민다경(공승연 분)과 자신의 아들과의 혼인을 추진하고 있었다. 해동갑족이 자신이 내민 손을 거부하고 이성계의 손을 잡았다. 이성계가 자신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을 일거에 뒤집기 위한 한 수였던 것이다. 민제의 딸과 혼인을 맺은 것은 이성계의 아들이지만 해동갑족을 틀어쥐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민제는 물론 이성계 역시 자신을 농락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한때 이름높던 사대부였던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계략은 방심한 정도전을 한순간에 궁지로 몰아 버린다. 정도전이 준비한 수가 의미없이 되어 버린다.
홍인방과 이방원은 닮았다. 오로지 이방원만이 홍인방을 읽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이치로써 헤아릴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오로지 이익과 욕망을 통해서만 관통할 수 있는 세계였다. 그곳에 홍인방과 이방원이 함께하고 있다. 정도전의 약점이 드러난다. 그는 논리적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모두 이치에 맞다. 그것을 넘어선다. 괴물이다. 홍인방의 무서움이 드러난다. 과연... 그러나 역사는 지금의 위기야 말로 홍인방 자신의 몰락으로 가는 과정임을 알게 한다.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성계는, 그리고 정도전은 지금의 불리함에서 벗어나 홍인방에 역전할 수 있을까?
이방지가 조금 더 강해졌다. 길태미와 싸우던 당시보다 아주 조금, 칼에 피가 묻지 않을 정도까지 강해졌다. 무휼은 자신의 스승 홍대홍(이준혁 분)이 진짜 길태미를 가르친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방쌍룡24수 가운데 4수가 남았다. 더 강해질 여지가 있다. 무휼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이성계와 길태미가 활을 겨누고 마주섰다. 삼한제일의 활과 삼한제일의 검이 서로를 겨눈 채 마주선다. 홍인방의 몰락은 필연적으로 길태미와 이들 젊은 고수들과의 승부를 예고할 것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가. 죽는 것이 누구인가는 명확하다. 그러나 여전히 고려에서 가장 강한 검객은 길태미일 것이다.
왕이 지배하는 천하가 아닌 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강호의 싸움일 것이다. 왕에 의해 좌우되는 싸움이 아닌 왕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지혜로 겨루는 싸움일 것이다. 역사와 다르기에 더 재미있다. 칼과 칼이 서로 부딪히고, 그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지혜와 책략들이 보이지 않는 살의를 가지고 서로 얽힌다. 누가 이길 것인가. 누가 더 강한가. 유치하지만 그 단순한 물음이야 말로 인간의 원초이며 본능일 것이다. 그 단순한 물음의 답을 구하기 위해 알몸으로 무대에 오른 투사들은 실력을 겨루고 관중은 환호하며 지켜본다. 야만이 곧 순수다. 가장 순수한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겨룬다.
이방지와 분이가 만난다. 분이와 연희가 만난다. 이방원과 분이의 사이가 엇갈린다. 분이는 이방원이 선물한 꽃신을 한쪽에 벗어 놓는다. 서로 너무나 달라진 운명에 눈물짓는다. 무휼만이 언제나 한결같다. 대의가 아닌 사람을 쫓는다. 인정을, 인연을 따른다. 땅새는 이방지가 되었다. 정도전의 곁을 지킨다. 무대가 만들어진다. 수레바퀴가 움직인다. 난세가 요동친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121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 두 남자와 두 어머니, 모성부정의 이유 (0) | 2015.11.26 |
---|---|
육룡이 나르샤 - 홍인방과 이방원, 그리고 권력의 본질 (0) | 2015.11.25 |
송곳 - 이수인의 눈물,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현실의 무게 앞에서 (0) | 2015.11.23 |
송곳 - 버려지는 과장과 부장, 어떤 사람들의 통렬한 착각 (0) | 2015.11.22 |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 유린당하는 여성과 피흘리는 자궁, 잔인함에 대해 (0) | 2015.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