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이란 원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사회일반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을 것이다. 여성에게는 힘이 없다. 여성은 결코 힘을 가져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힘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타고나기를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 채 태어난다. 뿐만 아니라 지식과 지혜조차, 재산과 권력마저 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무력하고 열등한 존재다.
남성의 이야기란 바로 그런 힘과 힘의 충돌인 경우가 많다. 누가 더 물리적으로 더 크고 강한 힘을 가지며, 누가 더 수준높은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누가 더 많은 부와 유효한 수단들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래서 남성의 이야기란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리저리 잔뜩 가지까지 뻗어가며 비틀고 꼬아서 한껏 늘려쓰더라도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한 가지인 경우가 많다.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대단한가. 그러나 어차피 여성들에게는 더 센 것도, 더 잘나고 대단한 것도 처음부터 허락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할까?
하필 남성의 일방적인 폭력에 유린당하고 희생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그래서 무척 흥미롭다. 폐쇄적인 마을이란 배경은 여성의 자궁과 닮아 있다. 남성의 일방적인 폭력에 지배당하며 어느새 자식을 잉태하고 보살펴야 할 자궁이 도리어 자식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남편 서창권(정성모 분)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어머니 윤지숙(신은경 분)은 딸 서유나(안서현 분)를 버리려 한다. 멀리 외국으로 기숙사학교에 입학시키려 하고,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까지 한다. 딸 가영(이열음 분)을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정작 딸의 병을 끝까지 부정하며 치료하기를 거부하는 또다른 어머니 경순(우현주 분)의 모습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을은 처음부터 윤지숙을 거부했고, 경순 역시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진실을 감춘 채 죄인으로 살아가야 했었다.
자궁이었기 때문이다. 잉태하기 위한 도구였다. 암사자들 역시 새로운 숫사자가 무리를 이끌게 되면 자신들을 잉태시키기 위해 이미 태어나 있는 새끼사자들을 물어죽이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한다. 그래야 더 젊고 더 강한 새로운 지배자의 씨를 받아 더 강한 새끼를 낳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다. 독립적인 인격이나 존엄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남편에 의해 판단된다. 단지 마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만으로 윤지숙은 마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여자가 된다. 자궁이란 그를 위한 가장 요긴하고 거의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윤지숙이 서창권의 아들을 낳기 위해 필사적이던 모습은 정작 자신의 딸 유나에 대한 냉정한 태도와 대비되며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 남편의 아들인 서기현(온주완 분)에 대해서도 친딸 유나에게 하던 그 이상의 헌신적인 모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여성에게 모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인가.
단지 아내가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숙의 남편 역시 임신한 아내를 버리고 냉정하게 떠나고 있었다. 고작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윤지숙과 강주희(장소연 분)의 어머니(정애리 분) 또한 마을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들어야 했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은 서창권과 김혜진(장희진 분) 두 사람이었을 텐데 모든 비난은 김혜진 한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토록 신참순경 박우재(육성재 분)에게는 살갑고 인심좋던 마을의 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의 동생에게 비난을 퍼붓고 물까지 끼얹고 있었다. 그래서 비틀린다. 서창권은 당장 노회장이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자 계획을 꾸미고 가진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실제 그를 죽이고 있었다. 노회장 역시 걸리적거린다 여기면 서슴없이 자신의 힘과 영향력으로 그 대상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윤지숙조차 그럴 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 역시 복잡한 사연과 이유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었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죄는 시작된다. 32년 전 윤지숙의 어머니가 뱅이아지매라는 이름으로 갓태어난 김혜진을 주인공 한소윤(문근영 분)의 집에 불법으로 입양시켜야 했던 그 이유에서부터. 죄는 그리고 다시 병과 함께 유전된다. 비틀린 삶처럼 유전병의 합병증으로 김혜진은 목숨까지 위험한 상태로 마을 아치아라로 돌아오고 있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마을에 살며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러온 누군가로 인해 김혜진은 태어났고, 누구도 바라지 않은 태어남에 윤지숙의 어머니는 그런 김혜진을 한소윤의 집에 입양시켰다. 김혜진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살기를 원하는 김혜진을 윤지숙과 윤지숙의 어머니는 철저히 외면했었다. 그들의 필사적인 외면이 김혜진을 서창권과의 불륜이라는 죄로 몰아가고 있었다. 김혜진은 죽었다. 누가? 어떻게? 왜? 하지만 단지 살인범만 잡아 처벌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강주희 역시 아버지가 다른 남매라는 이유로 차별당한 원한을 김혜진을 이용해 갚으려 한다.
두 가지 사건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하나는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된 2년 전 김혜진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진행중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의 범인을 쫓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건은 같은 의미를 내포한 위상동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2년 전 일어난 어느 성폭행사건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 가혹한, 더럽혀진 자궁만을 죄악시하는 폐쇄적인 마을의 카르텔이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 김혜진을 고독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로지 여성을 파인더 너머의 피사체로 여기며 대상으로 삼으려는 범인 강필성(최재웅 분)으로 인해 벌써 많은 여성들이 죽고 이제는 주인공 한소영마저 심각한 위기에 놓이고 있다. 하필 어째서 강필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웃는 표정이었던 것일까. 고문당하고 죽임까지 당하면서도 여성은 웃어야 했다. 무관치 않을 것이다.
상당히 드문, 주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안에 단단히 채워 여민 흔치 않은 스릴러의 수작이었을 것이다. 마치 퍼즐조각처럼 각각의 사연과 이유들이 개연성을 가지고 전체의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친절하게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오판하도록 함정을 판다. 방향은 명확하다. 그러나 새롭게 더해지는 조각들이 풍성하게 양감과 질감을 더한다. 다만 소재가 낯설고, 방식이 불친절하며, 무엇보다 꿈도 희망도 없다. 판타지가 없다. 하다못해 사랑조차 않는다. 기간제 미술교사 남건우(박은석 분)을 향한 가영의 일편단심조차 이성의 사랑이 아닌 오누이의 자연적인 이끌림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도 박우재는 몰라도 서기현이나 한소영 모두 서로에게 이성적인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욱 스릴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일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국드라마는 역시 멜로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입소문에 이끌려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보기에는 적합지 않은 드라마였다.
차라리 미워하기보다 가엾게 여기고 만다.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인간이 잔인한 것은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로 살처를 벼린다. 기만으로 잊고 외면으로 덮는다. 어머니가 아이를 버린다. 어머니가 자식을 외면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다. 괴물은 인간의 안에 있다. 인간이 먹이를 주어 기르고 마침내는 그 괴물에 잡아먹힌다. 피흘리는 자궁처럼 닫힌 마을 아치아라가 사람들을 품는다.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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