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공주의 남자 - 문종의 죽음과 세령, 승유의 산사에서의 만남...

까칠부 2011. 8. 5. 09:24

상징적인 장면일 것이다. 문종(정동환 분)이 승하하는데 관계된 모든 인물들이 모인다. 수양대군(김영철 분), 김종서(이순재 분), 양평대군(이주석 분), 신숙주(이효정 분), 단종(노태엽 분), 경혜공주(홍수현 분), 정종(이민우 분) 등등등... 그러나 정작 그 시간 세령(문채원 분)과 김승유(박시후 분)는 문종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산사라는 유리된 공간에서 단지 서로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드라마였다. 왕위 되고자 야심을 불사르는 수양대군과, 그로부터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지키고자 하는 김종서의 노심초사와, 누이로써 아우를 지키려는 경혜공주의 근심과,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려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신숙주와 한명회(이희도 분)와 권람 등의 탐욕과, 아내인 경혜공주를 도와 단종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는 정종의 고민, 그러나 그 한 편으로 그런 사정따위 상관없다는 듯 만나고 사랑하며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쩌면 수양대군의 즉위에 반발하는 민심이 만들어내었을 판타지. 수양대군의 딸이 아비를 거역하고 김종서의 겨우 살아남은 자손과 만나 해로하게 되었다는 전설로부터 세령과 김승유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나타난 그들. 차라리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지 서로의 집안이 사이가 나쁜 정도였지, 그러나 세령과 김승유의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시대의 격랑이 그들과 상관없이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건 막을 수 없는 건가?"

 

차라리 그들이 영리했다면. 영리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도 알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법도 알았다면. 하지만 그런 것이 젊음일 터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일 것이다. 솔직하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할 수 있는 진실함. 그것을 다른 말로는 경솔함이라고도 부른다. 언젠가 저들 역시 세상에 물들어 영리해지겠지만 그러나 한 번 더럽혀진 순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다. 어느새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며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김승유의 친구 신면(송종호 분)처럼. 하기는 어차피 그들은 스스로 세상을 알고 영리해지기 전에 세상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한 운명 앞에 놓이게 될 터다. 지금은 그대로도 좋지 않을까?

 

참 장면설계를 잘 한다는 생각이다. 경혜공주를 찾아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세령을 수양대군의 부인인 윤씨부인(김서라 분)이 강요하듯 출합하는 경혜공주의 사저로 들여보내고, 거기에서 친구인 정종의 결혼과 출합을 축하하러 찾아온 김승유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이튿날 경혜공주가 생모인 현덕왕후의 릉을 찾아 아무말없이 사저를 나서면서 그녀를 찾고자 동분서주하는 김승유와 재회하여 그와 함께 경혜공주가 찾아간 곳으로 여겨지는 현덕왕후의 릉을 향해 길을 나선다. 경혜공주는 배 위에 보이는 무뢰배들이 꺼려져 가마를 돌리고, 그러나 그러한 무뢰배들의 모습에 세령이 걱정되어 김승유는 세령을 쫓아 배위에 오른다. 결국은 엇갈림이었을 것이다. 경혜공주와 김승유가 끝내 만나지 못하는.

 

서로 겉돌고 있었다. 서로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진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놓인 현실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기에. 어쩔 수 없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마치 줄리엣이 로미오를 원망하듯 내뱉던 그 독백처럼.

 

"로미오, 당시은 어째서 로미오인가요?"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좋아하고 나서는 이유 따위는 상관없다.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세령이 수양대군의 딸인 것을 알았어도 김승유는 그녀에게 끌리고 있지 않았을까? 다만 지금 단계에서 김승유의 세령에 대한 마음을 더욱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수양대군의 딸임을 밝히지 않는 쪽이 낫다. 더욱 깊어졌을 때 서로에 대한 진실을 아는 쪽이 더 비극도 깊어지리라. 왜 하필 사랑하게 된 이가 수양대군의 이씨성을 받고, 그로부터 세령이라 이름지어진 그녀였던 것일까?

 

아마도 수양대군이 주도하는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과는 별개로 마치 문종이 죽는 순간 그러했듯 전혀 별개로써 김승유와 세령 사이의 감정을 좇아가 보는 것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이다.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야 했던 역사상의 인물들과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했던 두 연인과, 그것이 바로 시대와 멜로를 한 데 버무려 놓은 서사멜로의 매력일 것이니. 역사는 역사대로 흘러갈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자기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시대와 무관할 수 없으면서도 또한 시대와 유리된 별개의 존재로써.

 

수양대군의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되고, 그로 인해 문종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단종은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고 만다. 김종서가 안평대군으로부터 문종의 고명을 받아 그 앞을 막아서지만 역사는 수양대군이 이후 세조로 즉위하게 될 것을 이미 스포일러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죽을 것이고 안평대군 역시 친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단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노산군이 되어 비참하게 교살당할 터다. 동생을 잃고 남편마저 잃어야 했던 경혜공주의 비극은 수양대군을 노려보는 눈물젖은 결연한 눈동자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정종의 말처럼 그것은 마치 어리광과도 같은 발버둥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잃은 김승유와 아버지를 등진 세령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될 터이니. 아마 역사에 지나치게 빠져들고 나면 이 두 사람은 다시 민폐로 여겨지고 말지도 모르겠다.

 

문채원의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니 세령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가능성일 것이다. 하기는 그러니까 그 수양대군에게 김종서를 죽이지 말라 말하고,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아버지와 끝내 인연을 끊고 등질 수 있었던 것 아니었겠는가. 출합하여 궁을 나와 사저에 도착한 경혜공주를 만나는 자리에서 온갖 격정을 쏟아내는 경혜공주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넘기는 모습이라니. 조금 더 디테일하게 능숙하게 연기해 보였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 조용함이 좋았다. 앞으로 김승유와의 관계에서도 여러 일이 있을 텐데 그런 식으로 조용히 삭이며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혜공주와 세령은 분명 다른 캐릭터니까. 처한 입장도 다르고 헤쳐나갈 상황도 다르다. 무엇보다 배우 문채원의 개성이 다르다. 다만 디테일은 분명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긴장이 고조된다. 긴장이 고조되는 만큼 김승유와 세령의 마음도 깊어진다. 고조되는 긴장에 따른 불길한 예감이 서로의 감정이 깊어지는 만큼 비극을 예감케 한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우니. 문득 말을 몰고 길을 가다가 세령을 떠올리고, 잠 못이루고 밤을 지새다가 불공을 들이려 떠나고, 세령이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이 두 사람을 산사에서 마주치게 만든다. 세령의 그리움과 김승유의 격정. 그리고 문종의 죽음. 단지 사랑하는 것 뿐인데 어찌 세상인 이 두 연인의 마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탄탄한 대본에 감탄한다. 아름다운 영상에 감탄한다. 배우들의 연기에. 그리고 주연들의 매력에. 사랑은 이리 간절하고 시대란 이렇게 무심하고 비정하다. 김승유와 세령의 애절한 사랑과 예고되는 신면의 세령에 대한 간절한 짝사랑, 그리고 경혜공주와 정종의 엇갈린 운명까지. 단지 역사교과서에서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내용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갔다. 서사멜로의 본질에 닿아 있는 드라마일 것이다. 최근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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