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최종환 분)의 안타까움과 허무함을 알겠다.
"저 놈이 나라 말아먹을 놈이다!"
수명만 몇 년 더 남았으면 다른 대안을 찾아볼 텐데. 자식복도 없어서 기껏 아들이라고 있는 것이 의자(조재현 분)와 그만도 못한 교기 둘 뿐. 이제 죽고 나면 이 나라 백제는, 백제의 왕실은 어찌 되려는가?
"저 푸른 하늘과 청사는 짐을 과연 어찌 기억할까?"
왕이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면서 또한 국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왕권이 미약해도 왕권이 미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왕이 어떤 마음을 먹고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과 그 백성의 처지가 결정된다. 따라서 왕에게는 왕 자신조차 전부여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여인이어서? 가족이기 때문에? 혹은 공신이거나 믿고 아끼는 충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 주나라의 유왕은 각각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매희와 달기와 포사에 의해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그토록 현명하고 유능하던 당현종을 망친 것 또한 그가 너무나도 사랑하여 아들로부터 빼앗아 온 양옥환 양귀비였다. 의자 역시 바로 사랑하는 여인 은고(송지효 분)를 위해 자신을 위한 충신이 될 수 있었던 계백(이서진 분)을 배반하고 말았다. 한 번 배반한 이상 의자의 계백에 대한 자격지심과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계백을 죽여 후환을 없애던가.
모두를 가지려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은고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계백을 포기하거나. 더구나 의자는 은고를 얻기 위해 계백만이 아닌 은고의 일족마저 죽이는 배반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을 감추고 은고를 얻은 이상 전적으로 은고를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은고가 그 사실을 알았을 경우 의자 자신에게 어떻게 나오겠는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버리는 것도 있어야 하고, 그것은 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누구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하고, 후회할 일이 있다면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왕이 치러야 하는 댓가와 받아야 하는 벌은 비단 왕 개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에 미치고 백성 모두에게 미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의자가 꾸민 계략이 드러나서 은고와 계백이 의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의자를 망치려 들었을 때 그 결과가 과연 의자 개인에게만 미치고 말 것인가? 그렇다면 왕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니 왕이 왕 자신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은고를 의심하고 계백을 죽여야 한다. 후환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곧 나라의 주인인 왕이 해야 할 바다.
그러나 사랑하는 은고도 가지고 싶고, 계백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형이고 싶다.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계백을 속이고 이용하여 배반하였음에도 그러나 그의 욕심은 계백을 의형제로 여기고 싶어한다. 성충(전노민 분)과 흥수(김유석 분) 역시 계백과 친분이 깊으니 얼마든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질 수 있음에도 겉모습이나마 그들을 공신으로 예우하려 한다. 그 무엇도 놓으려 하지 않고. 그래서 결국 그가 계백을 놓아 버리게 되는 것도 왕으로써가 아닌 단지 자신의 것인 백제와 은고에 대한 집착이 그를 질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으로써 계백을 의심하고 죽였다면 그것은 왕답다 하겠지만, 이것은 필부의 옹졸함에 불과하다.
그것을 보았으니 무왕이 어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반드시 의자의 저같은 집착이 의자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칠 것이다. 은고에 집착하고, 자신의 나라에 집착하고, 백성에 집착하여, 정작 왕으로써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말리라. 나라의 중심으로써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왕이건만 그 자신이 집착을 가지고 감정에 휘둘리게 될 때 반드시 큰 파탄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의자왕 역시 무리하게 태자를 교체하고 일족에게 좌평의 자리를 나누어주는 등 백제의 오랜 뿌리깊은 권력구도를 무시한 결과 스스로 고립되어 나라를 나당연합군에 내주고 말았다. 그를 사로잡아 나당연합군에 넘긴 것이 그가 몸을 피하고 있던 웅진성의 성주 예식진이었다. 심지어 태자의 아들 부여문사가 작은아버지 부여태를 설득하여 사비성을 내주고 항복하도록 하고 있었으니 당시의 혼란을 굳이 말로 설명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여튼 참 진부한 상황전개일 것이다. 그렇게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자에게로 갔는데, 다시 위험에 빠져 계백이 구하려 가고 보니 그 사이에 임신이라... 물론 은고가 의자에게 간 것이 벌써 두 달이니 그 정도면 자각증상이 충분히 나타날 만도 했다. 하지만 역시 시쳇말로 쌀이 익어 밥이 되었는데 어찌하겠는가 하는 게 아니었을까. 계백으로 하여금 은고를 위해서라도 은고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설정이었던 셈이다. 은고 역시 이제는 계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의자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고.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이 드라마를 역사드라마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왕이 죽기 전 의자가 5년의 섭정을 하고, 의자왕이 즉위하고 2년만에 신라의 성 40여 개를 공취한 것이 계백에 의한 것이라. 하기는 그래서 성충과 흥수, 은고가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자가 직접 가서 장병들을 위로하고 명령을 내리면 모든 공은 의자의 공이 될 것이라고. 의자왕 즉위 2년이면 그래서 의자왕이 친히 대야성까지 함락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바로 이로 인한 것일 게다. 다음주는 김춘추가 백제로 온다 하니 대야성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고타소랑과 김품석이 계백에게 죽는 장면이 나오게 될까? 그러나 이때도 대야성 함락으로 상을 받은 것은 계백이 아닌 윤충이었다. 당항성까지 공략하고자 하는 것도 역시 역사와 일치한다.
이제는 차라리 궁금해질 정도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역사를 무시하며 능욕하게 될까? 그러면서도 가끔 놀라운 감각을 선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황산벌 싸움 이전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던 계백이 느닷없이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는 중책을 맡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더구나 당시 계백의 관직은 달솔, 좌평조차 아니었다. 다음주 대야성 공략이 나온다면 계백이 아닌 윤충이 상을 받게 되는 장면도 나오게 될까? 어쩌면 계백이라는 이름이 백제와 관련한 사료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될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나 타당성을 가지고 시청자에 보여지는가가 문제이기는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역사드라마로서의 드라마 <계백>이 가지고 있던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신기한 드라마일 것이다. 역사드라마인데 정작 역사시대에 어울리는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동시대인이 느꼈을 법한 것들이 전혀 화면을 통해 전달되어지지 않는다. 그저 역사시대만을 빌렸을 뿐 현대의 치정극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상당히 신선한 시도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의자와 은고, 계백, 성충, 흥수 등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것이 걸린다. 최소한 실존했던 시대 실존했던 인물에 대해 그리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는 사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유일하게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던 무왕의 죽음이 그래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고작 저런 정도에 불과한 왕자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 안쓰럽기조차 하다.
그나마 다음주는 기대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 7년이 지났고, 치졸했던 치정극도 끝났다. 여전히 역사와는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의자와 계백의 갈등은 드라마에 새로운 긴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만 그려진다면 말이다. 그리고 당과 신라, 고구려와 백제가 종횡하여 연합하며 치열하게 맞붙던 당시의 불꽃튀기던 정세도 역시. 그렇다기에는 의자왕 2년 오히려 백제를 찾아오는 김춘추의 존재가 거슬리기는 한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드라마 아니던가.
총체적 난국일 것이다. 과연 어떻게 지금의 위기를 타개해나갈 것인가. 그래도 다음주 예고편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제작에 여유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힘겨운 드라마다. 보고 있기가 그렇게 힘들다. 진심으로 작가와 제작진, 배우들을 동정한다. 안타깝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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