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남자는 누구나 라이더를 꿈꾼다!

까칠부 2011. 11. 14. 08:09

솔직히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남 운전면허 따는게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더구나 당일치기로 따는 면허다. 점차 실력을 키워 면허를 따기에도,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에도 상당히 빠듯하다. 하물며 오토바이자동차보다도 더 위험하다.

 

전현무가 나서서 평소 하던 것처럼 장난을 쳐 보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평소 도로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전현무와 같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얼마나 주위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험하게 만드는지. 아무리 예능이더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전현무를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것을 충실히 지켰다. 당연히 예능으로서의 재미는 거의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재미없는데 재미있었다. 이 무슨 재미인가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경규와 같은 심정이었던 때문이다. 아니 잠시 나왔던 김광석의 그리운 목소리가 필자의 마음이었다. 나도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

 

아마 남자의 로망일 것이다. 너른 대지를 달리는 할리 데이비슨의 굉음. 앞으로 숙이고 타는 오토바이는 속도를 즐기기 위한 것이다. 반면 핸들에 손을 얹고 자세를 꼿꼿이 하여 달리는 할리 데이비슨은 지금 앉아 있는 오토바이 위야 말로 자기가 있을 곳인 것 같다. 어디까지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할리 데이비슨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너른 사막이거나 막막한 초원이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달리고 있다.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처음 말위에 오르면서 일깨운 유전의 기억. 자유였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빠르기가 마치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줄 것 같다. 그래서 말의 등에는 어느새 날개가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차를 사랑하기 시작한 이유다. 그리고 사방이 막혀 있는 차와는 달리 바람을 직접 맞을 수 있는 오토바이야 말로 남자의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디든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다.

 

다르기는 다르다. 하다못해 자전거도 차와는 다르다. 일체감이 느껴진다. 패달을 밟으면 그 힘이 고스란히 바퀴로 전달된다. 지면의 작은 돌 하나도 다시 패달로 핸들을 쥔 손으로 전해진다. 패달을 밟는 힘만큼 바람이 불고, 길 위의 작연 변화마저도 온몸으로 그대로 느껴진다. 오토바이는 물론 직접 패달을 밟지 않지만 엔진이 바로 안장 아래 겉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경규나 김태원이나 오토바이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상당부분이 그래서 소리에 대한 것이다. 할리 데이비슨이 그래서 자사의 오토바이 엔진소리에 대해 특허까지 내고 있었다. 마치 오토바이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심장이다.

 

물론 필자는 이윤석만큼이나 겁이 많아 실제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로 나가지 못한다. 그렇게 위험하다. 한 순간 방심하면 자동차와 같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토바이는 너무나 쉽게 한 인간의 가능성을 앗아가 버린다. 자동차라면 단지 찰과상으로 끝날 사고에서조차 오토바이는 너무나 쉽게 인명사고로 발전해 버린다.

 

하기는 그런 위험도 좋다. 칼날 위를 걷는 아슬아슬함. 자연의 섭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냥을 할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오는 긴장을 짜릿한 쾌감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위험을 즐긴다. 자식을 낳아 길러야 하는 여성에 비해 나가서 적과 싸우고 사냥을 해야 하는 남성에게 주어진 특권일 것이다. 챗바퀴도는 듯한 뻔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도 좋지만, 그같은 아슬아슬한 긴장 위에 살아가는 짜릿함 또한 놓칠 수 없다. 그래서 남자가 기억하는 오토바이의 이미지란 앞서 말한 할리 데이비슨의 그것처럼 보통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일탈의 이미지와 그리고 굉음과 함께 마치 파멸로 달려가는 듯한 위태한 모습일 것이다. <남자의 자격>에서도 잠시 삽입된 영화 <천장지구>의 오토바이신이 그런 느낌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마치 절망하는 듯 달리는 오토바이의 모습.

 

그러나 이미지는 이미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에서의 오토바이란 말했듯 매우 위험한 탈것이다. 한 해에만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치명적인 일을 겪는다. 전현무의 작은 장난에 황보가 식겁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그래서다. 오토바이는 장난이 아니다. 도로주행은 더욱 장난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하필 황보와 문희준을 도로주행의 선생님으로 모신 것은 그래서 적절했다. 너무나 당연한 기본과 상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와 함께. 오토바이는 어디까지나 즐기는 것이다.

 

아무튼 너무나 적절한 소재였다. 재미와 상관없이 내내 필자는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끓어오르는 충동이 있었다. 나도 달리고 싶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거리를, 도로를, 광야를, 아무도 없는 그곳을 마음껏 달려보고 싶었다. 그런 꿈이 있었다.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마음껏 세상 끝까지 가보자. 그때의 오토바이는 당연히 할리 데이비슨이다. 두건과 선글라스, 짙은 수염, 청자켓청바지, 등 뒤에는 온갖 캠핑을 위한 도구가 가득 실려 있다. 한참을 달리다 멈추면 그곳이 하룻밤 집이 되고,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이가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연인이 된다. 물론 이루지 못한 꿈이다. 하지만 지금도 꿈을 꾼다. 오토바이에 날개가 달린 꿈을.

 

단순히 그저 웃기고 재미있어서 <남자의 자격>을 보는 것은 아닐 터다. 전임 신원호PD와 이경규가 한 목소리로 하고 있는 말. 다큐멘터리야 말로 예능의 끝이다. 다른 아무런 양념도 장식도 하지 않아도 진실은 담백한 그 자체로도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공감이라 하는 것일 게다. 그다지 재미가 없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끝까지 지켜보며 함께 설레어하던 필자처럼. 누구나 그와 같은 기억이 있다. 그와 같은 동경과 열망이 있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보기 힘든 방송이었음에도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눈으로는 끝까지 그들의 도선을 따라 움직인 것이 그래서였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였다.

 

지난주에 이어 다시 한 번 <남자의 자격>으로 돌아온 듯한 미션이었다. 다음주는 더 기대되었다. 고작 서울대공원길을 한 바퀴 도는 것만도 이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실제 여행을 떠나게 되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남자의 자격> 초기 석모도를 달리던 7인승 자전거를 떠올려 보게 되었다. 그때처럼 길 위에서 맞는 바람은 풍경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함께 바람을 맞고 싶어진다. 재미를 떠나 마냥 좋다.

 

이런 맛에 <남자의 자격>을 본다. 재미니 웃음이니 하는 이전의 원초적인 공감에서 오는 만족감.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그러면서 함께 공감하며 채워지는 것이 있다. 그리움이고, 바람이고, 뜨거움이고, 아쉬움이었을 터다. 바람처럼 그것이 TV화면너머로 느껴진다. 영화속 한 장면처럼 언제고 죽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세상끝까지 오토바이를 달려 보았으면.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데 원동기 면허를 따야 한다. 스쿠터로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단풍도 지려 한다. 날은 춥다.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바람은 차가울 것이다. 너무 뜨거워졌다. 너무 들떠버렸다. 늦가을이다. 약오르도록 기분이 좋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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