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려 든다. 아예 보지 않으려, 듣지 않으려, 그래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려고만 든다.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계기가 있으면 비로소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주 보고, 마주 듣고,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그리고 그로부터 사람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결심을 하게 된다.
결국 사람이 내딛어야 할 걸음은 지금의 딱 한 걸음에 불과하다. 그 다음은 일단 한 걸음을 떼고서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한 걸음을 딛고 나서야 다음 걸음도 뗄 수 있다. 그러나 당장에 서 있는 곳이 보이지 않으면 그 한 걸음조차 떼는 것이 그리 힘들다. 저 멀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바로 발 밑에 대한 확신조차 흔들어 버리고 만다.
그동안 이서연(수애 분)이 그랬다. 그녀가 그토록 알츠하이머라고 하는 자신의 병에 대해 그리 인정하지 않으려, 받아들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이유였다. 일부러 의연한 척, 오히려 당당한 척, 박지형(김래원 분)을 생각해 주는 척, 그것은 사실 체념이었다. 외면이었다. 도망이었다. 도저히 병을 마주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그녀로 하여금 약을 먹는 것조차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약을 먹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단단한 자아의 갑옷을 두르고, 자신이 이제껏 쌓아 온 자의식에 기대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서연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오기를 부렸던 것이었다. 괜찮다고. 이대로도 문제없다고. 차라리 이대로 버티다가 아직 괜찮을 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잊고 무너지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고. 그러면 도망칠 수 있다고. 그러나 현실이란 단순히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어도 맹수는 바로 그 등부터 이빨을 박고 뜯어먹는다.
계기는 도로 위였다. 마치 전혀 모르는 곳으로 한 순간 던져진 듯한 위화감과 두려움에 그녀가 애써 두르고 있던 자아의 갑옷은 균열을 일으키고 만다. 보지 않으려 듣지 않으려 웅크리고만 있던 현실이 그 균열의 틈을 비집고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병에 걸렸고 언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때 그녀에게 떠오른 전화번호는 다름아닌 박지형의 것이었다.
비로소 현실을 마주보게 된다.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마음 속 깊이 박지형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아갈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현실을 보지 않는 희망은 단지 미련일 뿐이다. 현실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때 그것을 희망이라 한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저 너머가 아닌 내가 닿을 수 있는 그곳. 체념이 그래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천 년 만 년 못 사는 건 누구나 같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고로 전혀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다시는 내일의 떠오르는 해를 못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그 시간을 늦출 수 있는 약도 있지 않은가.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남들처럼 행족하게. 오히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 알차고 의미있게. 이서연이 박지형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박지형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편하게 유쾌하게 보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지옥이 들끓고 있다.
강수정(김해숙 분)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그녀는 지금까지 항상 현실을 마주하려 애써왔다. 아들 박지형이 노향기(정유미 분)와의 결혼을 파토내려 할때도, 그런 박지형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더구나 그 여자가 알프하이머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하물며 그 여자와 박지형이 결혼하겠다 말하는 그 순간에도. 심지어 그러한 현실을 대하는 자기 자신마저 객관화하려 한다. 이서연을 동정하고 박지형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 있다.
아무런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기에 용기가 있고, 악함이 있기에 선한 것도 있다. 담담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내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필사적으로 견디고 버티려 애쓰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토록 절망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끝내 냉정하려 하는 것은 강수정 그녀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은 지옥이지만 보이는 것은 어머니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다. 끝끝내 버티고 버티려 애를 써 그리 보일 수 있는 것인데.
박지형과 직원들 앞에서 태연히 치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나 정작 자신이 치매인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극복한 것이 아니다. 아직 병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도 시간을 필요하다. 일단 체념이 필요하다. 체념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체념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저 먼 알지 못하는 곳의 희망이 아닌 바로 딛을 수 있는 한 걸음의 희망이다.
이를테면 연기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 희망을 갖는 연기다. 현실을 마주하는 연기다. 그리고 그 현실을 이겨내려는 연기다. 다만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살아가려 하는 때문이다. 이서연 그녀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짓는다. 억지로라도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의식이다. 그녀는 현실을 걸어가려 애쓰고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가족 이야기가 허투루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그토록 이서연에게로 향하는 엄마의 관심을 질투하며, 심지어 이서연을 증오하는 장명희(문정희 분)의 캐릭터는 그래서 이서연의 생모(김부선 분)과 더불어 무척 관심이 생긴다. 원래 비극에서 눈물은 바로 이러한 타자의 눈에서 터져나옴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게 된다. 어차피 울어야 할 사람의 눈믈은 큰 의미가 없다. 화해란 가족드라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소소하게 이서연의 병이 깊어지는 것이 보인다. 하루가 다르다. 한 주가 다르다. 이서연의 변화가 그에 따라 확연해진다. 그 미묘한 지점을 잡아내는 디테일에 작가와 배우 모두에 찬사를 보내는 바다. 수애의 목소리는 이서연의 독백톤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하필 이서연과 강수정이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잔잔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키울 때는 목소리를 키워서, 조용히 말할 때는 조용히 말하면서, 비극을 극대화해서 전하는 힘이 그녀들에게는 있다. 설득력이 있다.
다만 아쉽다면 대화가 너무 끊김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때로는 튀기도 하고 휘둘리기도 하는데 너무 짜 맞춘 듯한 느낌이다. 김수현 드라마의 단점이다. 가끔은 거슬린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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