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권력자는 소수였다. 반대로 그 소수의 권력자의 지배를 받는 민중은 다수였다. 그런데 어째서 절대다수의 민중이 절대소수의 권력자의 부당하면서도 무도한 지배를 별 저항없이 대부분의 시대를 살아올 수 있었는가. 눈앞에서 가족이 죽고 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데도.
아마 모르긴 몰라도 5년 전 강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당시에도 묻지마 살인의 범인은 칼을 든 채 모여 있는 시민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위협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범인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여 눈을 피하거나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였다면 사람들은 갑자기 용감한 투사가 되어 그를 제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강자에게는 약자가 되고 약자에게는 강자가 된다. 정글의 법칙이다. 생존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범인은 모여 있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침으로써 그들이 단지 개인이며 단지 개인에 비해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모여 있는 것은 다수지만 그러나 눈앞의 위협적인 강자 앞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개개인이 된다.
일벌백계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경우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더 많은 경우에 경계로 삼도록 한다. 벌을 받는 것은 개인이다. 혹은 소수의 개인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 혹은 소수의 개인들은 나 자신이고 또한 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에 비판적이거나 불온한 개인, 혹은 무리들을 제거하려 할 때 그들을 철저히 대중과 유리시킨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말하던 '후테이센징(불령선인'이 바로 그런 예다.
조선총독부에 저항하는 조선인은 불령한 조선인이다. 조선총독부에 복종하는 더 많은 조선인들은 선량한 조선인들이다. 선량한 조선인들에게는 그래도 혜택이 더 돌아가고 배려도 더 돌아간다. 일본인들이 지금도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가 조선인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아래 다수의 시민들은 별 탈 없이 오히려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오로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소수만이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당시 강남의 묻지마 살인범 역시 오로지 피해자 박민지 한 사람에게만 공격을 집중하고 있었다. 만일 그의 공격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면 오히려 공포에 짓눌린 누군가 그를 제압하려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살인범은 철저히 박민지 한 사람만을 공격하고 있었고, 그 결과 나머지 사람들은 타자로, 구경꾼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구경만 하면 안전하다.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해치려는 희생자야 말로 증오해야 할 대상이다.
광주가 경멸받은 이유였다. 지금도 기억한다. 80년 그 일이 있었을 때 아직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적의에 가득찬 목소리들을. 그렇게 광주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철저히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유리되고 말았다. 억울한 죽음도, 여전히 억울하기만 희생들도, 그로 인한 수많은 상처와 고통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리고 말한다. 보통의 시민들은 제아무리 권위주의 정부 아래에서도 그다지 피해입은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좋았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일이기에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만일 내가 희생자의 편에 서서 그를 위하려 했을 때 나 또한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눈앞의 저 흉악한 칼이 다름아닌 나를 노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절박하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해도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가족이고 친구일지라도.
아무리 옳은 뜻을 품고 저항했어도 그래서 권력에 의해 진압당하고 죽임을 당한 순간 무도하고 불령한 폭도가 되어 버린다. 반역자가 되고 죄인이 되어 버린다. 상종 못할 존재가 되고 만다. 관계를 단절하고서만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다. 제아무리 억울한 죽음이고 그 억울함에 동의하고 있더라도 그와 전혀 상관없는 사이가 되고서만이 자신의 안위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아까운 이들의 억울한 시체가 썩어가는 옆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현실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 위해 거리를 두고 외면한다.
고정준의 오히려 그러한 억울한 죽음을 즐기는 듯한 태도는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공포고, 곁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비극이란 당하는 입장에서는 공포일 것이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희극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방영중인 <천일의 약속>에서의 알츠하이머를 예로 들어 볼 수 있겠다. 이서연의 병을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이서연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공포일 수밖에 없다. 반면 몇 다리 걸쳐서 오현아에게 이서연의 알츠하이머는 어떻게 비치고 있던가?
아주 최근까지 사형수의 처형현장을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오락거리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행해지고 있었고, 처형이 있는 날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잡상인까지 모여 하나의 축제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사형을 당한 사형수의 고기와 피를 먹는 풍습까지 있었다. 철저히 공포로써 자기화하고, 그러면서 철저히 자기로부터 유리시켜 희화화한다. 차라리 죽은 이들을 비웃는다. 독립운동가를 비웃고, 혁명가들을 조롱하고, 민주화 투사들을 경멸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안전해진다. 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비극인지도 모르겠다. 공포는 두려워 꺼려하게 된다. 희극은 그저 웃고 말 뿐이다. 그러나 비극은 연민한다. 연민하고 동정한다. 연민은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단지 공포 뿐이었다면 그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다행스럽다 여기고 말 뿐이었겠지만, 끝내 피해자의 죽음을 보고 말았다. 그 억울함을 느끼고 말았다. 그 거리가 공포를 비극으로, 연민으로 바꾼다. 죄의식은 양심을 건드리고 양심이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어정쩡한 것은 그래서 어렵다. 권위주의 정부를 종식시킨 1987년의 6월항쟁도 결국은 억울하게 죽은 학생들에 대한 연민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권력이라는 폭력과 그 앞에 굴종하고 마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당장에 생존을 위해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라는 거대한 힘 앞에 미약한 힘이나마 있는대로 내던져 살아남으려는 이들이 있다. 함께 한다면 힘이 된다. 그러나 비웃는다. 그러한 현장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러면서도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하여 조롱하며 즐긴다. 심지어 그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근처 카페에서 그것을 구경하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고작 유리벽 하나의 차이지만 그 너머와 이쪽의 거리는 얼마나 멀던가?
각각의 개인이나 집단이 국가라는 권력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국가기관 하나조차 그들의 힘만으로 어떻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렇게 기득권을 욕하면서도 결국 모든 것이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회는 바뀌지 않고 사람들은 단지 욕만 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무어라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그런다고 될 수 있을 리 없노라고. 다수가 약자가 되는 이유다. 다수임에도 소수에 휘둘리며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공권력이 있는 것이다. 하필 경찰이 고정준을 구하고 조수영과 하태호를 죽도록 방치한 이유일 것이다. 나약한 개인들이 있기에 공공의 선과 정의는 힘을 갖는다. 비겁한 개인들이 있기에 공공의 구조는 그러한 선과 정의를 힘으로라도 강제하고 강요한다. 그러나 인격이 없는 공공의 선과 정의는 대상을 구분하지도 특정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도 죽은 이를 두고 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낄낄거리는 고정준은 살고 죄책감에 조금이라도 죄를 씻고자 최선을 다해 살았던 조수영과 하태호는 죽었다. 딸의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두고 단지 우스개로만 여기려는 고정준을 앞에 두고서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물론 어떠한 경우라도 불의한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연 저 가운데 단 한 사람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인정에 휘둘리지 않기에 공공의 규범과 구조는 개인을 지킬 수 있다. 그가 누구인가를 가리지 않는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 단지 그가 있기에 그를 지킨다. 선과 정의를 강제하는 힘.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래야 당연한 것일 테지만.
롱테이크로 찍을만한 장면이었다. 필자 역시 불행한 사건이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마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를 결심한 이유였을 것이다. 과연 지금 싸늘한 시체가 되어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저 이름에게 불과 그러한 일이 있기 하루 전, 아니 한 시간 전은 어떠한 시간이었을까? 평소처럼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들떠 웃으며 가까운 이들과 떠들던 이가 아니었겠는가? 다만 한 시간 뒤의 삶이 있었다. 아니 1초 뒤에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죽음 또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임신 2개월. 아이의 아버지와는 이미 헤어진 뒤라 했다. 그럼에도 아이를 지키겠다고, 혼자서라도 기르겠다고 아버지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려 해서일까? 아버지를 걱정해서 바로 직전 아버지를 위한 노후연금통장을 개설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한 딸의 모습을 혼자서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철없는 결정이 화도 나고 걱정도 되어 거칠게 퍼부은 것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거칠게 내뱉은 말로 딸은 상처를 입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위해 통장을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불과 사건이 있기 채 한 시간도 흐르기 전에. 누가 그 운명을 가늠할 수 있을까?
선한 자라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악한 자라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다. 선한 이라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악한 이라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현실의 부조리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귀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는 그 물음에 대해 백도식(김상호 분)이 별들에게 물어보라 했듯 하늘의 초월적 존재에게서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죽은 뒤에라도 억울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윤회를 만들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고. 부조리하기에 지옥이며, 부조리가 없기에 천국일 것이다.
하여튼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수사드라마에는 에이스가 있다. 수사를 주도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드라마 <특수사건전담반TEN>에는 그런 것이 없다. 서로 같은 출발점에서 다른 길을 찾아 떠나지만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같다. 팀장 여지훈(주상욱 분)의 범죄심리학도, 프로파일러 남예리(조안 분)의 프로파일링도, 민완형사 백도식의 독사라 불리우는 형사로서의 매서운 감도, 가장 하는 일 없어 보이는 막내 박민호(최우식 분)의 분주함까지. 이번에도 사무실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있던 여지훈의 결론과 직접 산을 뒤지던 백도식의 결론이 같았다. 박민호가 조사한 택시의 GPS조회결과는 백도식의 감과 일치하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불가능할 정도로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흔들림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어느 한 가지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수사의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듯이.
추리물과 수사물의 차이일 것이다. 추리물이란 아무래도 범죄자의 의도에 더 집중한다. 수사물은 그것을 추적해가는 수사관들의 과정에 더 무게를 둔다. 추리물은 트릭을 파헤치고, 수사물은 범인을 향해 단계를 밟아 나아간다. <특수사건전담반 TEN>이 수사물치고 범죄자의 트릭에 대해 상당히 허술하게 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떤 트릭을 썼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사관들이 그를 어떻게 찾아내고 접근해가는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특수사건 전담반 TEN>은 수사팀 전원의 팀워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룬다.
어쨌거나 긴 여운이 남는다. 과연 필자라면 어땠을까? 강남의 사건이 일어나던 그 장소에 필자가 있었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필자가 주저리 길게 떠든 이유일 것이다. 필자 또한 나약한 개인에 불과하다. 두려워하며 도망치려 할 것이다. 무서워서 내 일이 아니라 회피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후회할 것이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 차라리 그때 어떻게 했더라면. 사람이란 그런 동물이니까. 그래서 더 가슴에 맺히는지 모르겠다. 무겁다.
트릭이라는 범죄를 위한 장치보다는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드라마가 더 좋다. 이야기가 풍부하다. 생각할 거리도 풍부하다. 수사물이란 다른 말로 부조리물이기도 할 것이다. 어째서 범죄는 저질러지는가? 어째서 죄란 존재하는가? 악이란 무엇인가? 답은 역시 별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아마 그 답을 알게 된다면 그 또한 별이 되지 않을까?
담담한 가운데 힘이 있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느슨하다거나 허술하다는 뜻이 아니다. 꽉 짜여진 것이 차근히 보는 이를 조여오는 무엇이 있다. 어느새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세포까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즐겁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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