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 너무나 순탄한 기득권 유방과 도전자 최항우의 입장역전...

까칠부 2012. 1. 25. 19:17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방(이범수 분)이 저리 출세에 목을 매는 이유란 무엇일까? 어떤 절박한 이유로 유방은 최항우(정겨운 분)와 맞서려 하는가? 그에 비하면 최항우에게는 아버지와 친형과 같은 최항량(장현성 분)의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유방의 경우 초반의 비주류에 약자로서의 절박함마저 회사내 기득권과 어울리며 희석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유방이라는 캐릭터에 좀처럼 이입하기 어려운 이유다. 처음에는 오히려 더 강하게 이입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소망과 어머니의 간절함, 어떻게 해서든 3류대학에라도 들어가야 했고, 무리를 해서라도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해야 했다. 그를 위해 이것저것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당한 수단으로 입사하여 백여치(정려원 분)와의 관계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현재란 것은?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방이야 말로 한국사회의 부조리 그 자체인 듯하다. 회장의 손녀인 백여치가 배경이 되어 부정으로 회사에 들어갔음에도 전혀 아무일 없이 멀쩡하다. 심지어 수습딱지를 떼는 순간 무려 대리까지 승진해 있다. 그리고 엄연한 직장내 선임인 번쾌(윤용현 분)에 대해서도 사적인 고향선후배사이를 내세워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른다. 인맥과 연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줄만 잘 서면 부정으로 입사해도 버틸 수 있고, 연고를 빌미로 직장상사마저 부하처럼 휘두르고 부릴 수 있다. 과연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천하그룹이라는 모순된 사회 속에 유방은 그 부조리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차라리 자기 실력으로 본부장의 자리까지 꿰찬 최항우가 더 정당하며 정의롭다.

 

하기는 그래서 어느새 엘리트 최항우와 비주류인 유방이라고 하는 구분조차 모호해지고 있다. 같은 과제를 받았다. 천하그룹을 일신하기 위한 혁신안을 각각 장량(김일우 분)의 팀에 속하고, 최항우 자신의 팀을 만들어 경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달한 결론은 같다. 시간의 차이도 없다. 물론 차우희(홍수현 분)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기획안이 나온 순간 최항우와 유방은 동등하다. 같은 선상에서 서로 타겟으로 설정한 인천공장의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게 된다. 여기에서 유방이 이기게 된다면 최항우의 엘리트로서의 능력과 커리어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 대단한 능력과 커리어를 가지고서도 고작 유방 하나 이기지 못하고 휘둘린다. 설사 나중에 다시 한 번 유방을 이기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미 최항우가 갖는 엘리트의 이미지는 꺾이고 만 뒤다. 아무리 잘난 척 나서봐야 실속없는 허세로나 비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드라마의 한 축이 무너진다.

 

최항우가 이겨야 한다. 그래야 유방이 절치부심 최항우를 이기고자 노력할 동기가 부여된다. 강자 최항우와 그에 맞서는 약자 유방의 구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쩌는가? 유방에게는 벌써 백여치가 있다. 백여치는 천하그룹 회장 진시황(이덕화 분)의 하나뿐인 손녀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유방은 기득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오히려 진시황에게 도전하려는 최항우에 비해 유방이 더 기득권에 가까이 있다.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번쾌라는 수족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리는 유방이란 더 이상 이름없는 수많은 샐러리맨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 또한 기득권의 하나다. 유방이 이기면 부사장이 되고, 패배하더라도 최항우의 대등한 입장에서 겨루어 패한 것이다. 마치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 장량과 최항우가 서로 편을 가르려 할 때 유방이 최항우의 밑으로 들어가기를 바랬다. 최항우의 밑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샐러리맨의 설움을 보여주기를 바랬다. 그랬다면 동기도 더 분명해진다. 단순히 최항우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최항우에 대한 한과 분노가 생겨난다. 진시황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최항우의 동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최항우가 지금까지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시황을 쓰러뜨리려 할 때 그에 휩쓸리는 유방의 입장에서 최항우를 꺾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가 만들어진다. 최항우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휘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유방의 처지란 그 분노를 당연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보다 드라마는 유방을 벌써 최항우와 동등한 입장에서 반대편에 세웠다. 그리고 이제 그 실력에 있어서마저 대등하다. 샐러리맨 유방을 지워버리고 만 것이다.

 

안타까웠다. 최항량이 끝내 자살을 선택했을 때 유방은 어째서 그에 대한 작은 연민조차 비추지 않았던 것일까? 사람을 죽이고 그 누명을 자신에 뒤집어 씌운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는데 오히려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못 비정해보인다. 더구나 그 결과 회장인 진시황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되고 백여치도 그에게 호감을 보인다. 일약 비주류에서 비주류로 도약한다. 오히려 최항량의 죽음에 분노하는 최항우를 동정하게 된다고나 할까? 그가 어지간히 잘못된 수단으로 복수를 하려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유방은 자신의 후배라는 사실을 알자 직장선배인 번쾌를 마치 종부리듯 폭력까지 휘두르며 부리려 하고 있으니. 누구에게 더 연민이 가고 공감하게 될까?

 

조금 더 유방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필요가 있다. 더 절박하고 더 간절하게 더 높은 위로 올라가기보다 지금의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랬다면 사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차우희를 도와주는 유방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을까? 자기 처지도 그리 좋은 편이 아는데 남의 사정을 돌봐준다. 최항우와 맞서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 굽히지 않는 자존심과 의기가 두드러질 것이다. 역시 패배하는 것이 옳다. 최항우에 지고 벼랑끝까지 몰려서 과연 당장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인 수많은 이름없는 샐러리맨의 입장을 체험해 봐야 한다. 그래야 제목과 어울린다. 유방에게도 필연적인 이유와 동기가 생긴다. 지금으로서는 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성 없는 판타지에 불과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던가. 유방이 최항우를 이기고 성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샐러리맨과 무슨 상관이 있던가.

 

그런 점에서 아쉬웠던 것이 이번의 '그룹개혁혁신안'을 내놓기까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항우에게는 엘리트로서의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커리어를 쌓아 왔던 만큼 남다른 타월함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방의 역할은 무엇인가? 범증(이기영 분)의 역할도, 백여치의 존재도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당장 최항우와 유방이 서로 충돌하려 할 때 어떻게 양자가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서로의 장점을 드러내며 부딪힐 것인가에 대한 단서를 그를 통해 보여주어야 했는데 그것이 전혀 없었다. 유방의 장점은 무엇일까? 무엇으로 최항우와 겨루는가? 그에 비해 최항우는 어째서 최항우인가?

 

사건이 캐릭터와 밀착하지 않는다. 캐릭터란 개인의 성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드라마 안에서의 역할까지 아우른다. 과연 신약을 둘러싼 갈등에서, 그리고 이번 '그룹개혁혁신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는 드라마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가? 관계도 모호하고 감정도 선명하지 않다. 그저 순간적이고 단편적인 연출에만 의존할 뿐이다. 한 편의 완결된 드라마라기보다는 단속적인 콩트의 연속이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를 놀래킬까 웃길 수 있을까만 고민할 뿐 유기적인 완결된 구조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편하다. 이것은 단지 코미디다. 그리고 판타지다. 각각의 단속적인 상황과 장면을 통해서만 시청자들에 웃음을 주려는 드라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나면 정려원만이 남는다. 홍수현만이 남는다. 구조나 관계가 아닌 사건과 개인만이 남게 된다. 차라리 시트콤이었다면 더 재미있을 뻔했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 정말 아쉽다. 부분부분만 보면 참 재미있는데 전체를 보고 있으면 엉기고 성긴 것이 텅 비어 공허하기까지 하다.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시청자가 드라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연민을 통해서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뿌듯함이다. 성취감이며 우월감이다. 그럴만한 당위를 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방은 매력적이지만 그다지 마음이 가는 주인공은 아니다. 초반 천하그룹에 입사하기 위한 그의 절박함은 그의 무모함과 무례함을 희석시켜주었지만 이제 그는 기득권에 다름없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제는 회장의 외손녀인 백여치와 뛰어난 재원인 차우희라고 하는 양손의 꽃까지. 그에 비하면 매번 당하기만 하는 최항우는 그 절박한 동기 만큼이나 동정이 생긴다고나 할까?

 

유방이 아무리 약자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비주류의 심정을 토로해도 전혀 와닿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당장 유방이 놓인 상황부터가 그렇다. 과연 유방이 약자와 비주류를 말할 처지인가? 재미를 추구하느라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되는 이유다. 이제는 유방의 거침없음이 오만과 독선으로까지 여겨진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넘어가려 했었다. 설마 아닐 것이다. 분명 최항우와 유방의 대결은 최항우의 승리로 끝나고 유방은 패배와 굴욕 속에 절치부심 칼을 갈게 될 것이다. 최항우는 더 위로 올라가고 유방은 더 아래로 떨어진다. 그런 와중에 반전이 기다린다. 당연한 결론이다. 최항우는 원래 엘리트이고 기득권이었고 유방은 비주류이고 약자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유방은 주인공이고 최항우는 그의 라이벌일 테지만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괜한 설레발은 아닌가. 그러나 당장 보이는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재미있기는 하다. 분명 웃기다. 배우들도 매력적이다. 장면장면이 통통튀며 신선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고 있는 것은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20부작 드라마다. 큰 그림으로 보게 된다. 과연 이대로도 좋은가? 배반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놀라고 당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 그러는 것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도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다. 일단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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