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드라마의 시대배경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드라마에서 이미 한 번 언급된 바 있는 박동선 사건은 1976년에 일어났었다.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온 알 스튜어트의 음악은 1978년 발매되었다. 중정요원들이 쓰고 있는 베레타 권총은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대마초파동의 시작은 1975년 12월의 일이었다. 도대체 몇 년인가?
실제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 더구나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지금으로부터 채 40년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다. 그 무렵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40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등장인물들의 시간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원래 이러한 종류의 드라마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시대에 이입하는 재미일 텐데 그것이 도무지 어렵다.
하기는 드라마가 스스로를 역사드라마라고 주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회는 한빛회가 되고 김형욱과 김재규는 역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김재욱(김병기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최성원(이세창 분)은 아마도 최무룡과 신성일, 남궁원이라고 하는 당대의 스타들의 이름을 모아 놓은 것일 게다. 최성원이 제작하고 있는 '여름여자'의 제목은 신성일이 출연했던 영화 <겨울여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당시 <겨울여자>의 여주인공이 장미희였다. '여름여자'의 여주인공 이정혜(남상미 분)는 그렇다면 장미희였던 것일까?
장철환(전광렬 분)의 이름에서는 당시의 어느 누구의 이름도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과격함과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더구나 김재욱과의 관계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든다. 1969년 이래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정렴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는 분명 청와대와 관련한 또 한 명의 실장이던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원래의 차지철의 경우 하나회와 전두환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오히려 드라마에서의 장철환과 김재욱의 관계와 닮아 있었다. 둘 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성격 역시 차지철이 장철환이라면 전두환은 김재욱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한 마디로 그저 배경만 비슷하게 빌려온 판타지라 보면 될 것이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세조의 즉위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을 김승유와 이세령 두 사람의 로맨스에 맞춰 철저하게 드라마적으로 재구성한 바 있듯 드라마 역시 심지어 실존인물들마저 모티브만 빌려왔을 뿐 철저히 드라마에 맞게 픽션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장철환은 장철환일 뿐 차지철이 아니다. 하기는 김재욱 역시 실제의 김재규나 김형욱과는 달리 너무 노회하다. 김재규는 소심했고 김형욱은 저돌적이었다. 김재규가 김재욱과 같았다면 10.26은 어쩌면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이해한다.
아쉬운 부분이다. 실제의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것저것 할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비록 등장인물 태반이 단지 모티브만을 따왔을 뿐이지만 그렇더라도 실제 사건과 관련한 당시의 모습들은 여러가지로 많은 것들을 생각케 했을 것이다. 하기는 말했듯 불과 수십년 전이다. 당시 당사자들이 아직도 살아남아 사회 각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미 끝난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역사인 것이다. 근대 이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려 하더라도 종친회 등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부담이 너무 크다. 이런 정도가 좋다. 철저히 픽션으로 문제가 생길만한 부분은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만다.
참 안타까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치 대마초는 마약이다. 마약을 하는 것을 적발하여 단속하는게 무에 그리 잘못이고 문제인가? 그러나 노상택(안길강 분) 자신도 말하고 있다. 이미 1970년에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에 대마초와 관련한 조항이 들어가 있기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조항으로서 양담배는 단속해도 대마초에 대해서는 전혀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완전히 방치하고 있다가 무려 법이 만들어지고 5년만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저인망 훑듯 단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대마초에 대한 단속이 단순히 마약에 대한 근절 차원이 아닌 정치적 의도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점은 심지어 조사를 위해 불려간 당사자들이 고문까지 당한 정황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고작 대마초사범을 잡기 위해 고문씩이나 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 대마초라는 게 그렇게 중대한 반사회적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도 고문까지 해가며 대마초를 한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 잡아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은 처벌받은 이후에도 밤무대에조차 설 수 없는 가혹한 제제를 받았다. 당대의 많은 음악인들이 이로써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자신의 재능을 소진해야 했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라 할 만한 대단히 중요한 변혁의 시기였다. 미8군 출신으로 신중현이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세시봉을 중심으로 송창식과 윤형주, 이장희 등이 두드러졌다. 미국에서 돌아온 한대수도 있었다. 이들은 해외의 앞선 팝음악을 적극적으로 한국의 대중음악 속에 수용하던 첨병들이었다. 록과 블루스, 소울, 재즈, 포크 등등 이제까지 없던 다양한 장르들이 분화하며 새로운 대중음악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당시 대마초 파동만 없었다면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최소한 10년 이상은 빨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마초파동에 이은 가요정화운동은 그 뿌리를 완전히 도려내 버렸다.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대중음악은 완전한 암흑기로 빠져들게 된다.
조용필이 당대의 슈퍼스타로서 대중의 인기를 독점하며 독주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60년대를 거쳐 7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이 배출한 스타음악인 가운데 남은 사람이 이제 거의 없었다. 음악의 장르도 획일화되었다. 록을 하던 밤무대 음악인들이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때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들이 바로 혜은이, 조용필이었다. 물론 조용필의 음악은 남다른데가 있었다. 언제 나타났어도 그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조용필만이 보였던 8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은 그러한 초토화된 한국대중음악의 그늘이었을 것이다.
비로소 그것이 보여진다. 가장 기대한 것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아니 절대 피해가서는 안 되는 사건일 것이다. 한 시대의 음악이 저물었다. 그리고 오랜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재능이 꺾이고 이제까지의 모든 업적들이 남김없이 재가 되고 말았다. 필자가 가장 가슴아파하는 부분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저주였다. 하필 그러한 권력 아래 살았던 것이 재앙이었다. 한국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하는 것조차 권력의 눈치를 봐야 한다.
참고로 당시 대마초파동으로 그의 음악인생 자체가 부정되고 있었던 신중현의 경우 정권차원에서의 괘씸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정권을 홍보하기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러나 신중현은 자기는 음악만 하는 사람이라며 그것을 거절했다. 대신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명곡을 만들어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썼다면 신중현은 '아름다운 강산'을 썼다. 그리고 그것이 권력을 분노케 했다. 당시 활동을 금지당한 많은 음악인들이 록과 포크 등 체제저항적인 성향의 음악인들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대마초 등 마약사건은 정권차원에서 이슈를 만들고자 할 때 단골로 쓰이는 소재가 되었다.
아무튼 최성원과 이정혜가 나누는 대사에서 문득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별들의 고향>도 봤고 <겨울여자>도 봤다. 그런데 지금도 이 두 영화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워낙 어려서 본 영화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히 두 영화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최성원은 아마 그런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아직 '여름여자'의 내용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표절 운운하는 것이 오버스럽다. <겨울여자>를 한 번 더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확실히 조태수(김뢰하 분)는 건달이다. 만일 강기태(안재욱 분)가 조태수와 같은 건달로써 경쟁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조게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은 확실하게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밟아 놓는다. 그러나 강기태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경쟁관계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고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을 무참하게 폭행하여 망신을 주었던 배우 마도로스 박(박준규 분)에 대해서 오히려 아무일 없었다는 듯 형님으로 깍듯하게 모시는 것처럼. 그것은 한 조직의 보스로서의 조태수의 체면을 세워준다.
싸우다가 실력에서 밀려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싸움이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보다는 그릇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하들은 물론 장차 조직의 보스로서 행세함에 있어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굳이 연예인과 친분을 나누려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다. 싸움을 못해도 리더는 리더이고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똘마니는 똘마니다. 그것을 확인시킨다.
그저 단순히 칼만 잘 휘둘러 한지평까지 몰아내고 전국구 건달로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일 게다. 잔인하기만 해서는 한 조직을 이끌지 못한다. 한 조직의 보스와 똘마니와의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싸움을 못해도 보스는 보스고, 제아무리 천하무적이더라도 똘마니는 똘마니다. 그랴봐야 물론 깡패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스스로는 건달과 양아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건달은 되어도 양아치는 되고 싶지 않다. 마지막 자존심이다. 조태수의 자존심이다. 그가 보스인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강기태를 살렸다. 기회였다.
아무튼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느새 가지게 되는 감과 같은 것일 게다. 문득 느끼게 된다. 아직은 위기가 찾아올 때가 아니다. 위기가 있더라도 그렇게 치명적이거나 큰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더 크고 더 뻗어가야 하는 때다. 장차 장철환이 김재욱을 넘어뜨리게 되면 노골적으로 장철환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 이상 지금보다 더 큰 위기를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드라마의 분량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겠다. 강기태는 결코 조태수의 조직을 힘으로 이길 수 없다. 기회가 아니면 안된다.
어쨌거나 결국 강기태 또한 당시 시대의 부조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혜빈(나르샤 분)의 음반이 대박을 쳤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번 모양이다. 새로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하고, 여러 다른 유명연예인들과도 계약을 맺고, 심지어 레코드회사까지 인수하려 한다. 영화제작에도 투자하고 있다.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왔을까?
물론 음반 하나 대박치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음악인들에게 몫이 돌아간다면 아직 그러기에는 당시 한국의 음반시장이 그리 크지 않았다. 100만 장 넘겨 팔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이후부터다. 당시 음반을 판 수익 가운데 가수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음반을 내주는 것도 감지덕지다. 그런 것을 깨닫기에는 강기태 자신도 당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혜빈은 그다지 돈을 벌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누군가 이정혜의 사진을 들고 고아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정혜가 고아라고 하는 설움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순간 어떤 반전이 그녀에게로 찾아오려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이정혜에게는 축복인가? 불행인가? 드라마가 더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이정혜는 더 나락으로 떨어질 필요가 있다. 드라마의 힘을 빼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너무 잔잔하다. 여주인공이 너무 잔잔한 탓에 드라마까지 잔잔해져 버린다. 차라리 유채영(손담비 분)이 여주인공이었다면. 그녀였다면 단지 강기태와 유채영 사이의 로맨스만으로도 드라마가 시끌벅적해진다.
궁정동을 찾아갔다는 이유만으로 강기태의 어머니(박원숙 분)로부터 거절당하는 이정혜와 그것을 지켜보는 실제 궁정동에 스스로 깊숙이 몸을 담았던 유채영 자신의 입장이 상당히 역설적이다. 드라마의 재미는 역설에서 비롯된다. 모순과 아이러니가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든다. 두 사람의 입장이 역전되어 있다. 반드시 바로잡아지게 될 것이다.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유채영의 불행을 기대하기에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간절하다. 이래저래 안타깝다. 재미있다.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최대 위기이자 막 크게 도약하려는 강기태에게도 큰 위기다. 많은 가수들이 검거되고 활동이 정지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강기태에게 힘이 되어줄 그의 소속가수들일 것이다. 그에게도 책임이 돌아간다. 어떻게 그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낼 것인가. 흥미를 더해간다. 주인공을 괴롭혀야 드라마가 산다. 주인공 된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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